[창간특집]“우리는 뉴스와 열애중” 본보 여기자 4명 방담

  • 입력 2003년 3월 31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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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이정은 손효림 김현진 김수경 기자(왼쪽부터). 글솜씨와 맵시, 사랑과 일에서도 모두 프로를 지향하는 신세대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이정은 손효림 김현진 김수경 기자(왼쪽부터). 글솜씨와 맵시, 사랑과 일에서도 모두 프로를 지향하는 신세대다.

《‘여기자’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온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보았다. 어떤 에로영화 감독은 “여기자 여검사 여의사는 남자들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3대 배역”이라고 했다. 최근 TV 드라마 속에 기자가 자주 등장하면서 기자의 삶에 대한 질문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기자상의 90%는 환상이다. 쓰레기통을 뒤져 특종을 찾고, 때로는 취재원과의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시다가 중요한 내용을 흘려들으면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며 수첩에 옮겨 적는다. 이 시대에 기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여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뭘까. 20대 후반, 일과 ‘열애중’인 동아일보 여기자 4명이 만났다.》

▽이정은=아, 특종을 잡았을 때의 그 짜릿함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보면 그건 마약이에요. 그래서 이 직업에 빠져들죠.

▽김현진=기자들은 늘 고통과 엑스터시를 가르는 칼날 위에 서 있다고나 할까요.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무슨 일이 또 일어날까’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다려져요.

▽김수경=대학 후배들이 ‘어떻게 하면 기자가 될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데, 대부분 기자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죠. 드라마 속 여기자들은 어쩜 그렇게 다들 화려하고 예쁜지. 일은 거의 안 하죠.(웃음)

이정은 "특종의 짜릿한 맛 빠져들어 납작 엎드려서 문틈 취재도"

▽이정은=사회부 법조팀에 있을 때예요. 법원에서 아주 중요한 영장실질심사가 있었죠. 심사가 진행 중인 방에 들어갈 수 없어 기자들은 모두 ‘귀대기’(청진기를 대듯 방문에 귀를 대고 대화를 듣는 것)를 했죠. 도무지 안 들리는 거예요. 바닥을 보니 0.3cm 정도의 문틈이 있기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납작 엎드려 문틈에 귀를 쑤셔 넣었죠. 아, 한참 듣다보니 타사 기자들도 모두 포복자세를 취하고 있더라니까요.

▽김현진=그러고 보니 선배들이 기사 아이디어 찾아오라고 할 때도 ‘물어와!’라고 하잖아요. 처음엔 내가 ‘강아지’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이젠 저도 후배들에게 말하죠. ‘물어와!’ 호호호.

▽손효림=우리가 ‘물어오지만’ 그걸 통해 독자의 ‘알 권리’가 채워진다고 생각하면 값진 일이죠. 제가 맡은 사회면은 독자의 일상적 삶과 맞닿은 지면이라 고민을 많이 하게 돼요.

▽김수경=전 영화를 담당하다 보니 연예인을 많이 만나는데, 인터뷰 약속을 잡기가 정말 어려워요. 톱스타들에게 비굴할 만큼 인터뷰를 사정해야 할 땐, 자존심이 상하고 열도 받지만, 그래도 독자가 궁금해하니까….

▽이정은=한 정부기관의 비리 의혹을 캘 때였죠. 한 연예인이 연루돼 있다는 정보를 듣고 취재에 나섰죠. 확인이 잘 되지 않아 직접 집으로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더군요. 옆집 초인종을 눌렀죠. “저 ×××씨 팬인데요, 언니 만나러 지방에서 올라왔거든요”하면서 안면을 트고 이것저것 물어봤죠. 하지만 그 아줌마도 모르는 부분이 있어 결국 기사를 못썼죠. 당시 법조팀장 선배가 그러는 거예요. “98%가 확인돼도 기사는 못쓴다. 아주 정확히 100%가 확인돼야 쓴다. 모두 나가 뛰어라.”

손효림 "사회기사 독자의 삶과 직결 취재원과 수다떨다 진실 캐"

▽손효림=노숙자를 도와주는 분에 대한 미담 기사를 썼는데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독자에게 항의 메일이 왔죠. 그 사람이 노숙자를 앞세워 기부금을 챙기는 의혹이 있다는 거예요. 진땀이 나더라고요. 그 지적도 다소 음해 성격이 있었지만, 그 일 뒤론 누군가를 칭찬하는 기사를 쓰는 것이 누군가를 비판할 때보다 ‘함정’에 빠질 공산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됐죠.

▽김현진=맞아요. 얼마 전 한 매체의 칼럼에서 “여기자가 늘었는데도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기사는 별로 없다. 기자이기 전에 여성임을 망각하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했었죠. 하지만 이제 여기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던 시대는 지났죠. 그건 마치 특정 지역 출신의 기자에게 그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격이죠.

▽이정은=그렇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이 못 보는 걸 포착하기도 하잖아요. 전북 군산 윤락가에 대한 취재를 할 때였는데, 남성기자들은 단지 호기심으로 그곳에 접근하는 것 같더군요.

▽김수경=여기자의 수가 늘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아직 남성이죠. 처음에는 남성들의 거친 문화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단련했죠. 취재원과 맞붙어도 기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내공을 쌓았다고나 할까. 호호.

▽김현진=(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애 늙은이 되기 딱 좋죠. 기자는 나이나 연조, 성별과 상관없이 자기 기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커요. 어리다고 봐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김현진 "매일야근…친구도 못만나 '일' 불안하면서도 기다려져"

▽이정은=외모도 늙어요 늙어. 제 경우는 취재원이 대부분 나이가 많으니까 항상 무채색 정장을 입고 머리 스타일도 단발 커트죠. 모처럼 쉬는 날 청바지 입고 놀러 나갔다가 취재원과 마주쳤는데, 글쎄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손효림=최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기자들의 사무실 방문취재를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죠. 그러나 취재원과 만나면 만날수록 기사의 깊이가 달라지죠. 우리 문화에선 사실 전화통화만으로는 진실을 알아내기 어려워요. 얼굴이 안 보이면 쉽게 거짓말 하니까…. 또 전화는 꼭 목적을 갖고 얘기하게 되잖아요? 하지만 직접 만나서 수다 떨다보면 전혀 모르던 내용도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김현진=요즘엔 메이저 신문사 기자라는 자체가 ‘원죄’처럼 생각케 하는 일부 분위기도 있잖아요. 동아일보 기자인 게 뭐 큰 잘못인가요. 무조건 비난받을 땐 좀 힘들어요.

▽손효림=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이 사장으로 있었던 ‘남해신문’이 군정홍보료 명목으로 1000만원을 받은 사건도 그래요. 우리가 특종보도했지만, 그 기사도 ‘개혁장관 발목잡기’라며 매도당했잖아요. 어처구니가 없었죠. 만약 동아일보가 청와대 홍보코너를 만들고 1억원을 받았다면 그들이 문제삼지 않을 일일까요. 잣대는 하나여야 해요.

김수경 "드라마속 예쁜모습은 환상 남자들과 氣싸움 치열해요"

▽김수경=취재환경이 점점 열악해지지만 그래도 보듬어주는 선배들 덕분에 지탱해 나갈 수 있어요.

▽손효림=어떤 매체에서는 후배가 따낸 특종을 선배가 가로채는 일도 있었죠. 타사 기자들은 동아일보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를 무척 부러워해요. 비리를 밝히는 기사의 경우도 기사가 나간 뒤 해당 집단의 반발과 비난이 쏟아지는 경우가 많죠. 언젠가 한 선배가 ‘넌 다치면 안 된다’며 기사를 대신 써주며 ‘총대’를 멘 적도 있어요.

▽김현진=기자가 피곤한 직업이긴 해요. 이젠 친구들이 모임에 끼워주지도 않아요.(웃음) 거의 매일 야근하는 데다, 오랜만에 모임에 나가도 일이 터지면 회사로 불려오는 경우가 많으니. 항상 ‘5분 대기조’의 긴장을 유지하며 산다는 건 피 말리는 일이죠.

▽손효림=특히 휴일에 휴대전화에 찍히는 발신자 번호가 ‘2020’(동아일보사 국번)으로 시작되면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고 공포스러워요.(웃음) 으으. (회사로) 들어오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부터 드니까.

▽김수경=오후 6시면 칼같이 퇴근해서 휴대전화 꺼버리는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우린 그랬다간 난리가 나죠. 수습기자 시절엔 공중목욕탕에 갈 때도 비닐봉지에 휴대전화를 넣어 가지고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보면, 그런 사람들 부러운 것도 아니에요. 자기가 프로페셔널이 아니란 뜻 아니겠어요.

얘기를 나누던 중에도 4명의 휴대전화는 쉼없이 울려댔다. 거는 것과 받는 것을 모두 합치면 하루에 50∼100통의 전화를 한다. 자다가도 가끔 전화벨이 환청으로 들린다. 이런 노이로제가 그들의 엑스터시이기도 하다. 이게 그들이 사는 법이다.

정리=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참석자▼

▽경제부 이정은 기자 (1999년 입사·서울대 언론정보학과 95학번)

▽문화부 김수경 기자 (2000년 입사·서울대 언어학과 96학번)

▽위크엔드팀 김현진 기자 (2000년 입사·한국외국어대 영어과 96학번)

▽사회부 손효림 기자 (2001년 입사·연세대 신문방송학과 96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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