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스님의 산사이야기]<21>배추 5000포기 씻고 절이고…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8시 51분


해인사에서는 이번에 5000여포기 김장을 했다.사진제공 무일스님
해인사에서는 이번에 5000여포기 김장을 했다.사진제공 무일스님
이번 겨울 해인사에서 준비한 배추는 5000여 포기에 가깝다. 우리나라 최대의 수행도량 해인사에서 300여명의 스님들이 겨울 동안 먹을 김치의 양이다. 하지만 사찰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치이다 보니, 이 정도의 양이라 하더라도 내년 봄쯤이면 절반 이상이 줄어든다.

어려웠던 60년대를 살았던 노스님들의 말을 빌리면, 그때는 김치 반찬 하나로 겨울을 살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김치를 ‘염조(鹽祖)’라 불렀단다. 일부러 배추를 소금에 푹 절여 그 맛을 장아찌처럼 짜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치 한 조각이면 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짠맛이었다고 하니 ‘소금할배’라 부를 만도 했겠다. 그런데 지금은 소금간을 알맞게 맞추어 5000포기씩 준비하니까 시대가 바뀌어도 너무 바뀐 셈이다.

해인사의 김장은 꼬박 3일간 이루어진다. 첫날은 배추를 밭에서 뽑는 일부터 시작하는데, 올해 배추 농사는 어느 해보다 풍작이다. 선방스님들은 배추를 반으로 쪼개는 일을 하고, 학인스님들은 소금에 절이는 일을 맡는다.

스님들의 손놀림은 여유 있으면서 정확하다. 마치 고수가 칼을 든 것처럼 손만 닿으면 배추가 반쪽이 되고 하얀 속이 드러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긴 장화를 신고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스님들의 모습이 바닷가의 어부 같아서 더 우습다.

둘째 날은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씻는 일이다. 앞줄의 스님들이 흐르는 물에 설렁설렁 씻은 후 뒷줄의 스님에게 넘기면 다시 한번 헹구듯 씻어 놓으면 동작 끝이다. 이런 동작이 군대의 조직처럼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루 일거리가 반나절로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양념에 버무리는 과정이 마지막날 일인데, 이 일은 절 아래 마을 신도들의 몫이다. 절집 김장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는 무채와 청각이 고작이다. 파와 마늘은 금해야 하는 음식이라서 넣지 않는다. 그래서 절 김치는 익을수록 정갈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고 한다. 올해는 갓김치도 항아리 가득 담갔으니 겨울 입맛을 더 돋우게 되었다.

산중에서는 김장만 마치면 겨울 일을 다한 것처럼 든든하다. 이제는 군불 지피고 열심히 정진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그리고 김치 익듯 마음 공부도 익어간다면 이번 겨울 안거는 정말 백점짜리 공부가 아니겠는가.

해인사 포교국장 buddha1226@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