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觀 刈(관예)

  • 입력 2002년 10월 22일 17시 43분


觀 刈(관예)

刈-풀벨 예 饒-넉넉할 요 慟-서러울 통

勸-권할 권 耕-밭갈 경 穡-거둘 색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인간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목구멍이 捕盜廳(포도청)’이니 ‘사흘 굶어 도둑 안 되는 자 없다’고 했다.

豊饒(풍요)로운 요즘, 젊은 세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4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배고픔이나 굶주림에 대한 기억은 죽음만큼이나 섬뜩하게 다가온다.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굶어 죽는 이가 속출했던 그 옛날, 우리의 조선시대만 해도 ‘먹는 문제’는 王業 중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국책과제였다. 과연 옛날에는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이라 하여 ‘먹는 것’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중국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요소를 食衣住(식의주)라 하여 ‘먹는 것’을 제일 먼저 꼽는다.

자연히 그 ‘먹는 것’을 해결해 주는 農事(농사)는 萬事(만사)에 優先(우선)한다 하여 ‘天下之大本’(천하지대본)이라 하였으며 農事에 관한 한 위로는 帝王에서부터 아래로는 衆庶(중서)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성스럽게 대하였으니 그 태도는 가히 종교보다도 더 敬虔(경건)하였다. 혹 가뭄이 들어 논바닥이 거북이등처럼 갈라지면 왕은 안절부절 祈雨祭(기우제)를 올려야 했으며 寢食(침식)을 잊는가 하면 때로 慟哭(통곡)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제 아무리 백성을 부려도 農時(농시)를 빼앗지는 않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지엄하신 제왕의 신분에 직접 쟁기를 몰아 밭을 가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소위 勸農(권농)인 것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는 ‘親耕’(친경)은 帝王이 農事의 중요성을 백성에게 알리고 또 模範(모범)을 보이기 위해 매년 봄 吉日을 잡아 籍田(적전)을 직접 갈았던 의식이다. 3000년 전 중국 周(주)나라 때부터 유래된 이 풍습은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후 행해졌다. 물론 조선시대에 오면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定例化된다.

봄에 親耕이 있다면 보리를 거두는 여름과 벼를 거두는 가을 추수기에는 觀刈라는 의식이 있었다. 임금이 籍田에 임하여 稼穡(가색)하는 것을 친히 관람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이 때 奏樂(주악)을 울리고 행사가 끝나면 임금과 관원, 서민들이 함께 술을 마시는 勞酒禮(노주례)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 모두가 농사를 神聖視(신성시)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風俗圖(풍속도)다. 황금빛 들판을 보면서 생각해보았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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