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情으로 한술, 사랑으로 한잔

  • 입력 2002년 10월 3일 17시 56분


사진-전영한
사진-전영한
‘상사화’라는 이름의 꽃을 만났다. 새벽녘 꽃시장에서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만난 그녀는 너무나 선명한 빨간색으로 아침에 마주치기 민망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이름이 묘하네요. 왜 상사화죠?” 꽃집 아저씨께 묻는다.

“야들은(꽃집 주인은 꽃이 자식인양 표현했다) 꽃이 피면 잎이 죽고, 잎이 성하면 꽃이 죽어 버려야. 서로 상사병을 앓는 꽃이라 그라제.”

한 겹의 꽃과 잎도 서로를 그리워하여 병이 난다는데, 정 많은 우리들이야 가을마다 넘쳐나는 그리움을 무엇으로 다 담을거나. 정을 나눈 이들의 식탁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누구나 ‘엄마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산다. 그 ‘엄마밥’이란 것이 별난 요리도 아니요, 거창한 꾸밈새도 없으되 일찍이 혀뿌리에 ‘맛’의 잣대를 심어주는 힘이 있으니. 그런 힘을 가진 맛이란 하나의 종교처럼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저 손에 익은 칼 한 자루와 놋수저 한 벌이면 완성되는 엄마의 소박한 음식엔 한 방울의 비결이 숨어 있다. 당신이 한입 간을 본 숟가락으로 다시 휘저어 보는 손길에는 ‘모두들 잘 먹고 건강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담긴 사랑의 진액, ‘침’이 섞이는 것이다. 소화 효소와 정성이 담긴 엄마의 침은 그 어느 양념으로도, 조리 테크닉으로도 재생될 수 없기에 유일한 맛으로 기억된다. 특히나 모든 공정이 기계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는 모든 음식이 너무도 위생적이고 차가운 기운 뿐이라 그런 가운데 정에 굶주려 쓰러지는 인간들에게 ‘엄마밥’의 기억은 더욱 간절해질 뿐이다. 각박한 하루를 살다 보면 아침에 먹은 엄마의 밥이 저녁에 벌써 그립다.

그런가 하면 ‘열정의 침’이란 것도 있다. 열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마술적인 침이다. ‘내자식들 모두 건강해라’ 했던 엄마의 따뜻한 침에 비해 ‘당신은 내 거야’하는 연인의, 혹은 부부간의 침은 좀 더 이기적이고 뜨겁다. 뜨거운 만큼 빨리 식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엄마의 침에 비해 지속성은 떨어진다고 할까. 어쨌든 침을 나누는 사이가 되면 서로의 마술에 이미 걸려든 것이려니, 한입 한입 나눠 먹는 음식이 한낱 아이스크림이든, 질척한 크림소스 파스타든, 와인 한 잔이든 꿀처럼 달다. 함께 먹는 모든 맛이 혀에, 눈에 착착 붙어 버리니 맛의 형평성을 잃게 된다. 사랑에 빠진 채 맛을 본 음식들은 눈빛과 함께 떠오르고 숨소리와 나란히 간직된다.

이렇듯 위력적인 ‘침 섞인 음식’의 대표선수는 ‘한솥밥’이다. 가운데 놓인 한 그릇 음식에 숟가락끼리 부딪치며 먹는 맛은 가족간이라면 따뜻하고, 동료끼리는 구수하고, 애인 사이에는 에로틱하다. 흔히들 말하는 ‘한솥밥을 먹는 사이’는 한 집에 살거나, 한 배를 탄 동지라는 유대감을 잘 표현해 주는 예이다.

그 한솥밥은 이탈리아나 스페인, 브라질처럼 끈적한 가족애가 중시되는 라틴 문화에도 존재하는데, 그중 각종 해물이 들어간 스페인 요리 ‘파에야(paella)’는 큰 무쇠팬에 서빙되는 일종의 솥밥이다. 우선 철판이 두꺼운 팬바닥에 올리브유를 뜨겁게 달구고 마늘과 양파, 피망을 볶아서 매콤한 향을 퍼뜨린다. 거기에 불려 두었던 쌀을 털어 넣어 볶다가 물과 육수, 그리고 우리 입맛에 친근하도록 고추장을 함께 풀어 홍합이나 새우 등의 각종 해물을 올린 후 밥을 짓는다. 밥이 푹 퍼지면 맛이 떨어지는 해물밥은 고슬고슬하니 쌀이 딱 익었을 때 불에서 내려야 하는데, 덮어 두었던 뚜껑을 열면 ‘훅’ 하고 퍼져 오르는 해물과 쌀의 열기에 입맛이 돈다.

삼겹살 하면 ‘소주’가 떠오르듯 스페인의 ‘파에야’ 하면 따라붙는 술이 ‘상그리아’다. 그 나라말로 상그리(sangri)란 ‘피’를 뜻하는데, 레드와인을 많이 섞어 만드는 칵테일의 붉은빛이 피처럼 불그죽죽하여 상그리아란 이름이 붙었다. 냉장고에 있는 아무 과일이나 툭툭 썰어 넣고, 마시다 남은 와인을 부어 쉽게 마실 수 있도록 시럽으로 당도를 조절한다. 언뜻 들어도 과일향이 나는듯한 붉은 과실주인 상그리아는 복분자주나 산머루주 같은 우리네 토속주를 얼음과 토닉 워터로 희석시켜 대체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따라붙는 주종이나 조리의 이론이 아니라, 이 가을 나의 ‘정’이 담뿍 담긴 밥과 한잔 술을 ‘누구와’ 더불어 즐기느냐다. 한솥밥은 ‘아무나’와 먹는 것이 아니니까.

살살 걸어가는 바람은 귓가에 머물고 뽀얀 달에 살이 차는 향기는 처녀의 축축한 머릿결에. 지는 낙엽 세어보며 말랑해진 가슴에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발소리. 오감을 흠씬 주무르는 가을이다. 무르익은 대지에 정이 흠뻑 흐르는 가을이다. ‘독신주의’를 철없이 외치는 필자도 한솥밥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스페인식 솥밥 파에야▼

박재은

●재료

올리브유 (또는 식용유)1컵, 다진양파 1컵, 돼지어깨살 200g, 닭가슴살 200g, 홍합 12∼14개, 모시조개 100g, 새우 6∼8마리, 다진마늘 1작은술, 고추장 1작은술, 청피망 1개, 적피망1개, 토마토 2개, 생수 1컵, 쌀 3컵, 소시지 150g, 레몬 1/2개, 파슬리 약간

●만드는 방법

①올리브유를 달구어 1/2의 양파, 돼지고기, 닭고기를 볶는다.

② ①에 마늘, 토마토 다진 것, 파슬리, 채 썬 피망을 넣어 볶다가 소금, 후추로 밑간하여 15분 정도 중불에 익힌다.

③ 홍합과 조개는 물 1컵을 붓고 5분간 끓여서 익히고 껍데기를 떼어 버린다.

④ ②와 ③을 합친다.

⑤ 남은 올리브유에 1/2의 양파와 쌀을 볶다가 ④를 부은 후 고추장을 풀고 새우와 슬라이스한 소시지를 얹어서 밥을 짓는다.

*스페인 본토의 조리법에는 고추장 대신 ‘사프롱(Saffron·매운 식물성 양념의 일종)’이 들어가며, ‘초리조(Chorizo)’라는 본토산 소시지가 쓰인다.

▼각국의 '한솥음식'▼

어머니의 파워가 비교적 센 라틴, 이탈리아, 미국남부 문화권을 들여다보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온가족이 나눠 먹는 ‘한솥음식’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브라질의 ‘페이조아다’

돼지고기와 검정콩이 주재료인 일종의 스튜. 깊은 팬에 기름을 둘러 마늘과 양파를 볶다가 다진 돼지고기와 삶은 콩과 그 국물을 붓고 오래 끓인다. 마지막에 넣는 다진 토마토와 허브로 느끼함을 조금 가려본다. 아주 기름지지만 한번 맛보면 다시 생각나는 중독성 있는 요리.

미국 뉴올리언즈의 ‘잠발라야’

‘잠발라야’는 닭이나 해물을 한데 넣고 솥에 익힌 냄비요리. 토마토소스와 육수를 기본으로 한 크레욜 스타일과 육수만을 넣은 케이준 스타일로 나뉜다. 팬에 닭이나 해물을 익히며 소금과 칠리 파우더로 밑간을 하고 양파, 마늘, 샐러리 등을 한데 볶다가 토마토 페이스트와 육수를 넣어 익혀서 마무리.

이탈리아의 ‘카치아토레’

팬에 양파, 피망, 버섯을 볶다가 레드 와인을 붓고 졸인다. 소금, 설탕, 후추로 간을 맞춘 닭육수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다시 졸인 후 팬에 익힌 닭고기를 넣어 양념이 잘 배도록 졸인다. 소량의 버터를 떨어뜨린 뒤 마지막 5분은 오븐에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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