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과서로 가르치는 영어학원 "보내?" "말아?"

  • 입력 2002년 9월 17일 16시 41분


어린이 영어학원에서 미국 교과서(오른쪽 원내)를 사용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권주훈기자
어린이 영어학원에서 미국 교과서(오른쪽 원내)를 사용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권주훈기자

《“안창남을 배우기 전에 에밀리아 에어하트가 미국 최초의 여자비행사임을 알고, 조선왕조를 마주하기 전에 조지 워싱턴을 접한다. 일제의 만행을 알기도 전에 미국 남부 흑인노예들이 받은 박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추석은 그냥 ‘노는 날’이지만 추수감사절이나 할로윈데이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다….”

‘미국 교과서로 배우는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두고 한 학부모(36)가 털어놓은 고민이다. 미국에서 직수입한 유치원 혹은 초등학생용 교과서를 교재로 쓰는 어린이 영어학원이 늘어나고 있다. 수준 높은 영어구사, ‘미국식 영어’를 위한 문화 이해하기라는 효과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엷어지고, 어려운 영어로 인해 영어학습에 흥미를 잃게 될 우려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교과서 교재’를 둘러싼 전문가 3인의 얘기를 들어본다.》

■영어 흥미 떨어뜨릴수 있어

미국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제2외국어로 인식하는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교재와 달리 원어민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역사 과학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해 심층적인 읽을거리를 전달해 주는 ‘이야기 중심의 접근법’을 쓴다. ‘미국식 영어’에 친숙해질 수 있는 다양한 배경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수준높은 독해능력 또한 갖춰질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교육의 핵심은 ‘알파 플러스 원(α+1)’이다. 동기부여를 위해서는 어린이가 지니고 있는 능력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간 선행학습이 필요한 것이지만 국내에 들어와 있는 미국교과서들은 정상적인 한국 어린이들에게는 ‘α+10’도 넘는 어려운 단어와 구문이 들어 있다. 이는 오히려 영어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 된다.

어머니들은 ‘참고자료’로 미국 교과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해석의 부담을 느낀다면 무리해서 내용을 전달해 줄 생각을 하지 말고 놀이나 게임을 통해 내용에 접근해 나가는 것도 좋다. “지문 중에서 알파벳 ‘i’나 ‘a’를 찾기”, “지문의 단어 중 monday, morning이 있는 위치 찾기” 등을 통하면 아이들이 은연중에 영어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도 한다. 미국 교과서는 비디오나 CD롬 등의 부교재 사용을 전제로 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같이 활용하는 것도 좋다.

△이보영

△이화여대 영어교육과졸, 영어강사

△현 EBS라디오 ‘엄마와 함께하는 영어동화’진행자

■교습교본 갖췄는지 살펴야

우리나라 학부모처럼 ‘교과서 중심’으로 교육받은 세대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정교과서 제도가 없는 미국의 경우 교과서 역시 수업에 필요한 수많은 주, 부교재 중 한 권의 책일 뿐이라는 점을 국내 학부모들은 인식해야 한다.

교재의 커리큘럼, 교수법, 교사와 부모교육 등이 하나가 되어야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할 수 있다. 맥도날드가 세계 어디서나 공통된 요리법을 적용시켜 햄버거 맛을 똑같이 내고 있는 것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는 쓸만한 쇠고기 한 조각을 수입한 수준에 불과하다. 연구부 인력은 적고 프랜차이즈 영업부 인력이 제일 많은 국내 유수 어린이 영어학원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미국 교과서를 가르치는 영어학원에 보낼 때 어머니들이 체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학원측에서 교사들을 상대로 한 별도의 ‘티칭 매뉴얼(교습 교본)’을 갖추었는지 살펴야 한다. 단원마다 할당돼 있는 교육목표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채 교과서만 던져주고 교사 각자가 알아서 ‘읽고 해석’해 주는 차원이라면 별 장점이 없는 것이다. 또 아이들이 집에서 혼자서 혹은 부모와 함께 배운 내용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별도의 자습장(워크북)이 있는지, 원어민이든 한국인이든 교사들이 유아교육 혹은 영어교육학 자격증을 갖췄는지 등도 필수점검사항이다.

△박정규

△뉴질랜드 국립켄터베리대 영어교육원 공동설립자

△현 ㈜팔스월드·팔스랩 연구소 대표이사

■유치원생엔 혼란 부를수도

눈, 코, 입 등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가족, 사회, 국가에 대해 가치관을 차례로 형성하는 것이 유아교육의 올바른 순서다. 어린이의 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중간에 불쑥 미국 교과서를 통해 미국의 공민(公民)이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어린이에게 혼란을 준다. 특히 만 5세 이전의 어린이들이 미국 교과서의 반복학습을 통해 미국 문화에 대해 ‘어설픈 선입관’을 지니게 된다면 이민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다음에야 자녀를 ‘한국인’으로 키우는 데 있어 모양새가 좋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학생이 초등학생 이상인 경우, 학부모가 ‘체’역할을 하면서 자녀에게 ‘비판적 수용’의 자세를 길러 줄 수 있다면 미국 교과서는 훌륭한 교재로 쓰일 수 있다. 특히 삽화가 매우 훌륭해 ‘그림책’으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 꼭 영어공부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지도 아래 그림을 보여주면서 ‘미국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자녀가 원어민에게 미국 교과서를 배우는 경우라면 다른 교재와 달리 노래나 춤을 통해 영어를 익히는 과정이 많지 않으므로 어린이가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많다. 그룹지도라 하더라도 교사와 학생간에 친밀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인지, 수업 중에 자녀에게 개별적으로 눈높이를 맞춰주는 시간을 갖고 점검해 봐야 한다.

△심숙영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부설 유치원 교사(3년)

△현 숙명여대 원격유아교육 정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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