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세계경제의 앞날 美 먼델교수에 듣는다

  • 입력 2002년 9월 9일 18시 46분


로버트 먼델 교수
로버트 먼델 교수
《올해 고희를 맞은 노(老) 경제학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짊어져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허전함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말 곳곳에는 귀기울여 들을 만한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자신이 정확한 통계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겸양의 미덕과 자신의 발언을 즉시 철회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199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의 로버트 먼델 교수를 4일 오후(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의 웨스틴 하버 호텔에서 만났다. 먼델 교수는 이 호텔에서 열리고 있던 세계직접판매협회연맹(WFDSA) 11차 총회에 연사로 초청받아 자신이 태어난 캐나다를 방문중이었다.》

유럽 11개국 단일통화인 유로 출범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평을 듣는 그는 대표적인 통화통합론자답게 “세계경제는 세계통화를 필요로 한다(World Economy needs World Currency)”며 ‘세계통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차 세계대전 후 국제통화체제의 기초였던 브레튼우즈 협정을 거론하면서 “제2의 브레튼우즈 협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세계 주요국의 경기 감속(減速)에 우려를 나타내고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의 경기회복은 지역별로 다른 속도로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유럽이 오랫동안 취해온 지나친 사회복지정책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유럽의 경기침체가 미국보다 더 길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또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환율변동폭을 줄일 수 있는 장치 마련과 충분한 외환 확보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국의 외환위기 직후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 정부가 택했던 지나친 원화 평가절하(달러당 원화환율 급등) 정책은 분명히 잘못된 처방전이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세계 주요국 경제의 현실과 전망을 어떻게 보나.

“미국 일본 유럽의 경제가 모두 평균 이하로 떨어져 세계경제가 하강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보기술(IT) 혁명과 80년대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감세정책 효과로 90년대에 ‘행운의 역전’에 성공했던 미국 경제부터 비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기는 내년 초쯤 회복될 것이며 이르면 올겨울로 회복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일본 경제는 90년대부터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투자 확대로 얼마 전보다는 다소 나아 보인다. 중국 경제는 앞으로도 비중이 더 커질 것이다.”

세계 ‘3대 경제권’ 가운데 특히 유럽 경제의 현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유럽 각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사회보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정부예산 지출도 많은 경제구조다. 이렇게 되면 경제정책 운용의 효과적인 수단이 없어지고 경제의 경쟁력도 떨어진다. 그렇다고 한번 높아진 사회보장비 비중을 대폭 낮추는 것은 해당 국가 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택하기가 어렵다.”

-귀하가 말하는 ‘세계통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또 앞으로 국제통화체계의 방향은….

“앞으로도 여전히 미국 달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통 화폐’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새내기’인 유로는 몇 년 내에 달러와 경쟁하게 될 것이다. 많은 나라가 달러와 유로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세계통화’는 ‘단일세계통화’와는 다르다. 단일세계통화는 각 나라가 자국 통화를 포기해야 하므로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세계통화란 달러와 병행해 사용되는 통화를 의미한다.”

그는 경제정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 ‘환율 목표(Exchange Rating Tar-geting)’를 선호했다. 통화량이나 물가보다 환율을 축으로 한 정책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었다.

“정책 선택에서는 크게 통화 목표, 인플레이션 목표, 환율 목표가 있을 수 있다. 선진국은 주로 인플레이션 목표에 초점을 두고 통화 목표를 쓰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환율 목표라고 생각한다. 특히 경제규모가 크지 않은 나라는 변동환율제를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경제 대국(大國)의 통화와 맞추는 것이 유리하다.”

-미국 기업들의 잇따른 회계부정 사건이 미국 및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응징하면 된다. 현행 법률만 잘 적용하면 되며 굳이 법을 개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그리 크거나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먼델 교수는 경제정책에서 정부의 역할을 비교적 중시하는 경제학자로 꼽힌다. 그가 생각하는 정부와 기업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일까.

“원론적 이야기지만 정부는 법을 제정하고 기업은 법을 준수하면 된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 로비를 할 권리가 있다. 단지 기업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특히 기업간 경쟁이 치열한 미국보다는 대기업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정치적 힘이 큰 일본이나 한국에서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기업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려면 대기업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기업규모가 크면 마찰이 일어난다. 한국의 대기업은 공기업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이 취해야 할 통화 및 재정정책 방향은…. 또 한국경제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구체적인 자료를 지금 갖고 있지 않으므로 자세한 언급을 하기는 어렵다. 다만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은 우선 원-달러 환율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해 원-엔(일본) 환율과 원-위안(중국) 환율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또 일각에서 거론되는 한국 중국 일본간 3국 자유무역지대 창설도 바람직할 수 있다.”

먼델 교수는 이와 관련해 한국에 ‘사실상(de facto)’의 고정환율제와 외환보유액 확충을 권고했다. 그러나 기자가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1000억달러를 넘어섰는데 더 외환보유액을 쌓으라는 뜻인가”라고 반문하자 “아, 그런가. 그런 정도라면 외환보유액은 충분하다. 그래서 정확한 통계를 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며 ‘외환보유액 추가 확충’ 발언을 철회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후 IMF 역할에 대한 견해는….

“IMF의 프로그램이 한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달러당 원화환율이 1800원이 넘도록 한 처방은 IMF와 한국 정부의 완전한 잘못이었다. IMF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판단은 한국이 해야 했다. 한국은 당시 지나친 환율급등을 막았어야 했다.”

토론토〓권순활기자 shkwon@donga.com

▼로버트 먼델 교수는…▼

로버트 먼델 교수는 국제경제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학자다.

먼델 교수는 1960년대 후반 내놓은 ‘안정화 정책(stabiliza-tion policy) 이론’을 통해 “정부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적절히 섞어 사용하면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더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분석틀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면서 현대 개방 거시경제학의 토대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더 진전시켜 나온 학문적 성과가 ‘먼델-플레밍 모델’. 상당히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대체로 고정환율제 국가에서는 재정정책이, 변동환율제 국가에서는 통화정책이 효과가 더 크다는 이론이다.

그는 특히 ‘최적 통화지역(optimum currency areas) 이론’을 만들어낸 학자로 유명하다.

최적 통화지역이란 각국이 ‘공통 통화(common currency)’를 사용해 협력하면 도움이 되는 지역.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자유로운 국가는 인플레이션 실업 등과 같은 ‘거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통화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이론은 90년대 들어 빠르게 진행된 유럽 통화통합과 단일 경제권 출범의 이론적 기초로 활용됐다.

유럽연합(EU)에서 적극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특히 99년 1월1일 EU 11개국 단일통화인 유로가 출범하면서 ‘유로의 아버지(Father of the Euro)’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유로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공로는 9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유엔 국제통화기금(IMF) EU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미국 캐나다 중남미 등에서 경제자문 역할도 맡았다. 한때 IMF에서 일했지만 이 기구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많이 발표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때는 한국 경제상황을 많이 안타까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버트 먼델(Robert Mundell) 교수 약력▼

△1932년생(70세) △캐나다 출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및 영국 런던정경대 졸업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에서 박사 학위 취득 △국제통화기금(IMF) 근무 △‘폴리티컬 이코노미’ 편집장 △미국 시카고대 교수 △뉴욕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교수(현재) △199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안정화 정책 이론’ 개발 △‘최적 통화지역 이론’ 개발 △‘유로의 아버지’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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