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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13일 2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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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신비’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서울과학관 특별전시장에 들어서면 입구에 장례식장의 근조(謹弔) 표시처럼 흰색 바탕에 검은 색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전시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증해 주신 분들을 위해 경건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관람 바랍니다.’
열린 자궁으로 5개월 된 태아를 드러내고 있는 임부, 무뇌증과 뇌탈출증 등의 선천성 기형을 앓은 태아, 수직으로 또는 수평으로 정교하게 절편을 뜬 인간 등은 모두 실제 인간의 시신으로 이뤄진 표본이다. 귀금속 상점의 보석처럼 유리 속 검은 벨벳 위에 조그맣게 놓인 기형아의 표본을 보고 있노라면 실로 착잡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전시가 한국의 관람객들에게 그리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9일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자녀와 함께 관람한 학부모 이정희씨(37)는 “약간 비위가 상하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전시된 태아도 진짜 태아냐”고 되물었고 그것도 실제 유산된 태아를 특수 처리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약간 놀라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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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주관사 지에프의 권오성 사장은 “전시품을 만든 군터 폰 하겐스 박사는 한국전 개막 첫날 ‘달라, 달라(different, different)’ 하며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전시를 대하는 관람객들의 태도가 유럽과 너무 다른 데 하겐스 박사가 놀랐던 것이다. 유럽 전시 때는 관람 도중 기절하는 사람도 간혹 나왔다. 한국에서는 기절하는 사람은커녕 관람객들이 전시된 표본을 마치 장난감 대하듯이 다뤄 박사를 당혹스럽게 했다.
똑같은 전시를 놓고 한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시가 시작된 영국쪽의 반응은 아주 달랐다.
영국의 가디언지 등은 지난해 시베리아의 부랑인, 정신질환자 등 연고 없는 56구의 시신이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대학에서 하겐스 박사 측으로 넘어간 사실을 독일 잡지 ‘FAKT’를 인용해 보도했다. 하겐스 박사는 이 보도에 대해 노보시비르스크대학은 연고자가 없는 행려자들의 시신을 수집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고 자신은 이 연구소로부터 합법적 절차를 거쳐 시신을 획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닥터 프랑켄슈타인’이라고도 불리는 하겐스 박사는 시신을 사들일 뿐만 아니라 한해 3∼5구의 시신을 특수처리한 뒤 대학이나 의학연구소에 팔아 수익을 취해왔다. 물론 기증된 시신이나 장기를 사고 파는 것은 많은 국가에서 합법적이다. 그러나 영국의학협회(BMA)는 “하겐스 박사가 하고 있는 작업의 금전적 측면이 꺼림칙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겐스 박사는 1945년 구 동독에서 태어나 예나대 의대를 다니다 서독으로 탈출했다. 77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연구실에서 해부학자로 일하면서 ‘플라스티네이션’이란 기법을 창시했다. 플라스티네이션은 인체의 수분과 지방 등을 제거하고 특수 플라스틱으로 대체함으로써 근육조직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기법이다. 그는 독일보다는 구 소련에 속했던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다롄(大連) 등에서 주로 활동해 왔고 현재 다롄에서 살고 있다. 하겐스 박사로서는 인건비 절약이 중요했는지 모른다. 플라스티네이션으로 하나의 시신을 처리하는 데는 최소 1500시간이 걸리고 일일이 핀셋으로 근육에서 지방을 뽑아내는 수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그가 시신 관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국가를 골라 작업해온 데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는 ‘양들의 침묵’의 하니발 렉터 박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다. 늘 전위미술가 조지프 보이스 스타일의 검은 중절모를 쓰고 다니고, 인체 해부가 공개된 장소에서 실시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열렬한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인체 해부를 의학실험실이라는 밀실에서 꺼내 민주화시켰다고 자부하는 하겐스 박사의 전시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최초 전시장소로 유럽보다는 일본을 택했다. 일본에서 96∼98년 열린 전시에는 250만명이 다녀갔다. 이후 유럽으로 장소를 옮겨 독일의 베를린 만하임 쾰른, 벨기에의 브뤼셀, 오스트리아의 빈 등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까지 800만명이 전시를 봤고 이들 전시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약 6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겐스 박사는 전시수익금으로 ‘인간 박물관(Museum of Man)’을 짓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그의 전시는 기본적으로 상업적이다. 그것도 시신을 재료로 삼아 상업성을 추구한,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전시다. 영국 언론은 그 전시에 ‘과학’이라는 수식어를 달기를 주저했다. 그 대신 ‘시체 예술 쇼(corpse art show)’, ‘시체 전시회(corpse exhibition)’, ‘엽기적인 쇼(freak show)’라고 불렀다. 이를 해부로 봐야 하느냐, 충격적인 전위예술로 봐야 하느냐는 논쟁도 벌어졌다. 그런 전시가 상업적인 대관을 위주로 하는 전시장이라면 몰라도 과학의 전당인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열리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립서울과학관 전시담당자인 조철희씨는 “전문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자문하진 않았지만 외국에서 전시를 본 몇 사람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본 결과 ‘좋았다’는 반응이 많아 전시를 허용했다”며 “건강과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 시점에서 인간의 몸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과학 전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이 전시를 둘러싼 외국의 논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한국 전시의 감수위원인 조사선 서울대 의대 해부학과 교수는 “플라스티네이션은 오래 전에 알려진 기술이어서 의학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전시는 아니다”라며 “그러나 일반인의 인체 해부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 줄 수는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반면 한승호 가톨릭대 의대 해부학과 교수는 “시신이 표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학계가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전시는 별 논란없이 큰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사후에 플라스티네이션을 위한 인체기증을 희망한 사람은 고작 2명에 불과하다고 전시 주관사는 밝혔다. 반면 전시를 둘러싸고 늘 논란이 많았던 유럽에서는 최근 수년간 5000명가량이 인체기증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전시를 놓고 한국인과 유럽인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울 뿐이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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