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문화' 국제 심포지엄 "예술부터 이념의 장벽 허물자"

  • 입력 2002년 5월 31일 18시 40분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와 주한독일문화원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열린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 초청 국제심포지엄 ‘통일과 문화’가 30일 막을 내렸다. 그라스는 29일 주제발표 ‘통일은 계속 풀어나가야할 과제’에서 상호존중에 입각한 점진적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권고했다. 동독출신의 시인 우베 콜베는 30일 열린 주제발표 ‘독일통일과 작가의 역할’에서 자신의 판문점 방문 소감을 형상화한 시를 낭독, 갈채를 받았다. 그라스의 주제발표문과 콜베의 시 ‘2002년 5월 28일 판문점’을 싣는다.

▼獨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 통일에 대한 제안

1995년 나의 소설 ‘광야’가 출간되자 이 소설은 독일에서 엄청난 분노를 몰고 왔다. 그 이유는 내가 통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은 동독인의 시각에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동독인들은 서독에 진 패자로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당당하게 통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당당한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했다. 서독인들은 마치 식민지 사람들을 대하듯 동독인들을 얕잡아 보기도 했고, 파산선고를 받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재산을 압류하여 이득이나 챙기려는 것처럼 점점 더 탐욕스러워졌다. 당시 유행한 ‘청산’과 ‘평가’라는 단어는 혹독한 현실을 의미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독의 통화를 성급히 도입하고 동독의 경제적 잠재력을 새 주인에게 넘겨준 처사는 동독이 독자적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으며 무서운 실업률을 낳았고 생산 수단의 90%가 서독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 소설 ‘광야’는 이런 과정의 시작단계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부각시켰을 뿐이지만, 그 다음의 상황은 비관주의자라는 평을 듣는 나마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아직도 통일은 모두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며 계속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 그렇지만 우리 독일인은 축하를 받을 만하다. 통일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독일인에게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통일을 눈감아주었다. 한편 서독이 긴장완화에 기여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의 전제조건이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 정부와 모스크바에서 최초의 협정을 맺은 사람은 사민당 당수인 빌리 브란트였다. 그가 야당인 기민당의 저항을 무릅쓰고 당시의 동독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선을 독일과 폴란드의 최종적인 국경으로 인정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 깊이 패인 골 위에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시지푸스의 과제처럼 보인다. 바위는 항상 골짜기로 굴러 떨어진 채 다시 꼭대기로 밀어 올려주기를 기다린다. 남북한간에 놓인 것도 이러한 시지푸스의 과제다. 그러나 과연 아직 끝나지 않은 독일통일 과정을, 이제 막 통일로 나아가는 한국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공통점도 물론 있다. 한국과 독일의 분단이 똑같이 2차대전과 냉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유럽과 독일에서는 냉전이 뜨거운 격전을 낳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한국에서는 300만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그리고 통일을 후원하는 강대국이 있는가 하는 점도 문제다. 독일인에게 고르바초프가 그랬듯, 한국의 통일을 눈감아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이 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통일을 위한 염원과 의지는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질 한국에서도 통일의 기쁨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줄 것이다. 한국이 통일 과정에서 독일이 겪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몇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1. 서독인에게는 동독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돼있었다. 늘 징징거리는 가난한 친척쯤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동독인들이 자신을 이등시민으로 여기고 있다. 통일된 뒤 부유한 남한이 가난한 북한에게 승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한국도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2. 통일의 가능성이 열려도 서두르지 말기를 권한다. 독일에서도 단숨에 통일할 것이 아니라 두 국가의 연합체제를 거쳐야 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연합체제 안에서 남한이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면, 북한인들은 훗날 어느 정도 대등한 파트너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3. 남북한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같은 나라의 유대를 강조하며, 상대방의 예술을 존중하고 제대로 평가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문화는 이데올로기와 경제에서 비롯된 제약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됐다. 특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리〓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동독 출신 시인 우베콜레 기념시 발표

2002년 5월 28일 판문점

내 고향 독일에서는

그런 것이 끝났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전쟁은 멈추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여름에

땅은 얼어붙어 있다.

나는 줄 위에 걸린 빨래의 풍경을 떠올렸다.

내가 이런 맥락에서

좀 더 명료하게 볼 수 있을까.

거기에 빨래는 없다. 그래 좋아.

호감이 가는 장교들,

스위스 측의 붉은 바라크에서의 점심

(한국 조각가가 만든 소는 여러가지 식기로 만든 은빛 날개를 푸른하늘 위로 펼치고, 서울에서 멀지않아도 깨끗한 공기)

스웨덴 측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물음-여러분 질문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침묵,

그것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저 흰 왜가리들은 어떤 종류지?

저기서 꺽꺽대는 것은 꿩이 아닌가?

저 많은 논이 정말 모두 쌀 농사를 위한거야?

농부들은 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그럼 저기는 이미 북한이란 말이지?

이런 것들은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시도 아니다.

브리핑하는 미국인들은

스스로 ‘이건 연극이야’하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물어봐서는 안 된다:

부조리극, 웃음

습관처럼 자신이 나갈 곳을 찾지만,

멀리 가지는 못한다.

가장 중요한 평화,

정적: 멋지군

만약 120명의 군인이

단지 우리의 안전한 방문을 위해

거기에 있다면, 그리고 150만이

서로 무엇인가 할… 준비태세에 있다면,

그래, 서로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위해?

적은 도대체 뭐라 부르지?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한다.

적이니 당연하지

그는 마치 도시에 있는 친구들처럼

여기서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운다.

독일에서도 그랬어.

원 세상에, 바로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으르렁대고 있다:

서로 증오하고 있다.

나는 이 으르렁댐이 독일에서

어떠했는지 알고 있다.

만약 여기서 그때와 같이

메아리처럼 맞대응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불리우는

다리 위로 누군가 넘어가서

저쪽의 다른 이들과 얘기하고,

다시 이 쪽으로 돌아오고,

저쪽 편에서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왔다가 다시 넘어가고,

그리고 이것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단지 무엇인가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만약 마지막 말을 하고 모든 것이 끝난다면,

다음에 할 말이 첫 번째 말이 되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번역〓맹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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