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일기]제자의 주례청탁

  • 입력 2002년 1월 24일 16시 19분


“선생님, 저 신기호입니다. 그간 잘 계셨지요?”

“그래, 잘 지내고 있니? 목소리가 참 근사하다. 직장에도 잘 다니고?”

“실은 부탁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 드립니다.”

“아, 이제 결혼식 올릴 생각이니?”

“예, 그래서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왜, 주례를 서 달라고?”

“예, 꼭 해주십시오. 2월 3일 진주에서 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작년 가을에 결혼할 생각이라며 주례를 부탁하던 녀석은 장모님의 병환이 깊어 결혼식을 미루어 왔었는데….

헤어진 지 20년이 넘은 제자. 그것도 직접 담임을 맡았던 제자도 아니고 첫 발령지였던 전남 고흥의 자취하던 동네의 아이다. 학교에서부터 나와 함께 퇴근했고 아침에도 같이 만나서 등교했던 출퇴근길 친구들 중 하나다.

초보 선생이었던 나는 실수 투성이었다.학년초에 환경미화심사를 한다고 그러면 화분을 준비한답시고 일요일에 아이들을 몰고 산으로 갔던 철없는 선생. 교실에서 작은 도난 사고가 났을 땐 아이들이 반성을 하지 않자 울면서 사표 내겠다고 짐을 싸며 아이들을 울린 못난 선생이었다. 저희들과 달리기를 하면 늘 꼴등을 하던 나를 놀리던 꼬맹이 녀석들이 이젠 서른을 넘겼으니….

2년 전, 형규의 주례 부탁에는 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달려온 녀석의 정성에 못 이겨 주례를 섰는데, 이번엔 거절할 명분도 없다.

그래도 지난 번 보다는 덜 떨리리라. 주례 순서도 알고 주례사에도 자신이 생길 것 같다. 결혼에는 내가 선배이니 그간의 경험을 진솔하게, 짧게 말하면 될 것 아닌가?

미리 늙는다는 남편의 핀잔에도 즐겁다. 20년만에 만나게 될 제자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며칠 동안 설렐 것 같다. 아이고, 이젠 부부싸움도 못하게 생겼다. 제자가 본받으면 안 되니까….

장옥순 46·전남 구례중앙초등학교 교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