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학술계]테러-정쟁 강풍속 지식인 역할논쟁 열기

  • 입력 2001년 12월 25일 18시 03분


새 천년을 맞는다며 떠들썩했던 2000년과 달리 차분히 시작됐던 2001년, 지식인들은 냉전체제 붕괴 후 1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됐던 방황을 서서히 접고 차츰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묵직한 인문사회과학들의 대중화가 활발히 시도됐고, 지식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격렬한 논쟁도 다시 불붙었으며, ‘9·11 테러’ 후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해 전문가들 나름의 분석을 해 내기에 분주했다. 한 해 동안의 학계와 지식인 사회를 총점검해 본다.<편집자>

새 천년을 맞는다며 떠들썩했던 2000년과 달리 차분히 시작됐던 2001년, 지식인들은 냉전체제 붕괴 후 1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됐던 방황을 서서히 접고 차츰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묵직한 인문사회과학들의 대중화가 활발히 시도됐고, 지식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격렬한 논쟁도 다시 불붙었으며, ‘9·11 테러’ 후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해 전문가들 나름의 분석을 해 내기에 분주했다. 한 해 동안의 학계와 지식인 사회를 총점검해 본다. <편집자>

▽목소리 되찾은 지식인들〓1980년대 말 냉전체제 붕괴 이후 방황하던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올해 초부터 다시 제 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현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지식인들이 전면에 나서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그들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에는 ‘대안정책연대회의’처럼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본격적 비판과 대안 제시를 공식적 목표로 내건 경우도 있지만, ‘비전@한국’이나 ‘미래전략연구원’처럼 대부분은 명확한 이념적 지향은 밝히지 않고 비판적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참여를 않겠다고 밝혔지만, 지식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여러 시민운동 단체들이 정치세력화를 공개적으로 시도하고 있어 내년 선거를 앞두고 논란이 예상된다.

▽지식인의 역할 논쟁〓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탄압이냐 언론개혁이냐를 놓고 지식인들이 정부와 언론사의 대리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논전에 참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이 제정한 ‘문명간 대화의 해’에 발생한 ‘9·11 테러’의 충격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관심사도 바꿔놓았다. 지식인들은 신테러리즘, 테러 전쟁의 정당성, 그리고 전반적인 세계질서의 재편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슬람 문제를 다룰 만한 전문가조차 턱없이 부족한 국내 상황에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기보다는 대부분 해외 지식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데 그쳐 우리 지식인들의 역량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옛 스승들의 부활〓올해는 특히 서구화의 물결 속에 뒤켠으로 물러났던 우리의 옛 스승들이 재조명을 받은 매우 의미있는 한 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탄생 500주년일 뿐 아니라, 근대 한국 지성사의 큰 별인 함석헌과 김교신의 탄생 100주년, 그리고 이들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의 탄생 111주년이기도 했다. 학계 지방자치단체 문화단체가 힘을 합쳐 마련한 경북 안동지역의 퇴계축제와 경남 진주지역의 남명축제에서는 이들의 삶과 사상을 되새기는 연극, 판소리, 백일장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고, 기념학술대회는 전국 곳곳에서 개최됐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우리의 정신적 뿌리가 건재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지만 전통문화와 일반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좀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유영모 함석헌 김교신 등의 전집 연구서 등이 출간되고 학술대회도 열렸지만, 이들의 사상을 현재적 가치로 재조명해 내는 것은 이제부터 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김용옥의 논어 논란〓김용옥씨의 ‘TV 논어 강의’가 화제를 모으고 있던 2월에 고려대 서지문 교수(영문학)가 한 일간지에 ‘공자에게 무례한’ 그의 강의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면서 이른바 ‘김용옥 논란’이 시작됐다. 2000년 말부터 시작된 김씨의 논어 강의는 1999년 말∼2000년 초에 있었던 그의 노자 강의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논어’는 ‘노자’와 달리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적었다. 그의 파격적인 강의방식과 해석의 정확성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논란이 계속됐고, 뒤이어 그의 저서들에 대한 표절논란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김씨는 예정됐던 100회의 강의 중 64회를 마친 후 돌연 강의를 중단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강의는 대중매체를 통한 인문학강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에 대한 인신공격과 함께 학문적 역량에 대한 비판까지 겹쳐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밖에…〓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의 위기 속에 지식인들은 대안을 모색해 갔다. 대학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강좌나 세미나는 재야 문화강좌에서 시도됐고 대학 밖에 독립적인 연구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 함께 출판가의 불황도 겹쳐 기초학문의 재생산 구조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처했지만, 대학에 진입하지 못한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고전번역 및 대중교양서 출판은 오히려 활발해졌다.

2001년 학계의 쟁점이 된 문제는 무엇보다도 ‘근대성’이었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견해와 문화가 공존할 여지를 많이 넓혀놨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사회가 ‘탈근대’를 이야기할 만큼 근대성을 갖춘 사회인가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다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인문사회과학 각 분야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어 2002년에도 논의가 계속될 전망이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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