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조 정치이념과 규장각 분석한 정옥자관장

  • 입력 2001년 12월 12일 17시 56분


《왕권과 신권(臣權)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숨지는 모습을 본 정조(正祖). 그가 등극 후 설치한 규장각은 단지 ‘학문에 경도된 임금’의 호사취미였을까.

정옥자 서울대 규장각 관장(59·국사학과 교수)은 최근 펴낸 책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효형출판사)에서 규장각의 교육기능이 사실상 ‘왕권을 보위하는 문신 근위부대 육성이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정관장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되 어떻게 정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당대 정치사의 맥락에서 역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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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선왕인 영조가 각 세력간의 견제를 위한 탕평책에 소진되는 것을 보면서 왕권을 옹립할 이데올로기적인 친위부대를 육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가 그 현실적인 방편이었지요. ”

정조5년인 1781년 처음 실시된 ‘초계문신’이란 정6품이상이나 7품이하의 과거에 새로 급제한 37세 이하의 문신 중에서 인재를 뽑아 교육하다가 40세가 되면 현업에 복귀토록 한 재교육시스템. 인물 선정은 의정부에서 했지만 교육은 규장각에서 맡았으며 무엇보다도 정조가 직접 선정된 인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

“17세기의 정치구조는 산림(山林)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학계의 영수가 정계의 지도자가 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런 신하들을 통치하려면 군주 자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했기 때문에 숙종 영조 정조 등이 학문에 능통한 ‘군사(君師)’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센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왕이 직접 신하를 가르치고 그들을 학문으로 제압해야했던 것이지요.”

정조가 명청대 패관소설이 유행하는 등의 당대 문장경향을 비판하며 문체반정을 도모한 것도 신권 견제의 일부였다. 당시 신체문(新體文)을 구사했던 것은 신권을 주장했던 노론 벽파였던 것. 정 관장은 문체반정을 통해 이들을 노론 시파로 흡수하려 했던 것이 정조의 복안이었다고 해석한다.

정 관장은 “정조는 신권 견제책으로 초계문신제 등을 통해 왕을 보위하는 이른바 ‘근신’(近臣)들을 길러냈지만 말년에는 자신이 근신을 너무 키웠다고 후회했다”고 지적하고 “이 근신세력이 이후 세도정치의 뿌리가 되는 것을 보면 개혁이란 중단없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 관장은 30, 40대를 오로지 규장각에 쌓여있는 고서들을 읽는 일로 보낸 정조와 규장각 전문연구가. 초계문신에 관련된 자료도 “신이 올라” 하루 수십책씩 규장각 책을 읽어대던 30대 연구자 시절에 발견해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다듬어왔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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