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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10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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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너 교수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는 순수한 학자였다. 그는 사료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소홀히 하지 않는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학설을 세우려 하였고, 또 그렇게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세상의 어느 곳을 가도, 특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고 비뚤어진 해석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그러한 경향을 누구보다도 싫어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일반의 관심을 외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먼 훗날까지 남아서 학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국 그러한 착실한 연구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한 와그너 교수는 조선시대의 정치기구와 이를 움직인 양반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고 뒤에는 중인(中人)으로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제도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그 합격자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단순히 문과방목에 기재된 합격자의 가계(家系)뿐 아니라 그 인척 관계를 아울러 조사하여 카드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자연히 족보(族譜)를 이용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그래서 하바드-옌칭 연구소의 동양도서관 한국부는 한국의 어느 도서관보다도 가장 많은 한국 족보를 소장하게 되었다. 원본의 구입이 불가능하면 이를 복사하여 소장하였다. 이같이 족보의 학문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의 업적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광범하게 수집하여 정리된 자료가 공개되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 지대한 편익을 제공하리라는 것은 국내외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가 한국사의 학문적 연구에 정성을 다하여 온 실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또 그가 얼마나 세속적 욕심이 없는 순수한 학자였나 하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오늘날 어디서나 학문의 세계가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것 같다. 순수한 학자가 그리운 때다. 이런 때에 진정한 학자 한 사람을 또 잃었다. 가랑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서 와그너 교수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 마음은 쓸쓸하기만 하다. 길이 영혼의 평안을 누리길 빌 뿐이다.
이기백(한국사·학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