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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9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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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작년 이맘 때 윤 선생님의 책이 출간됐을 때 지식인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떤 성향으로 분류됐는지가 큰 관심사였습니다. 일부에서는 분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해방 후 우리사회에서 쉽게 드러내기 어려웠던 이념적 지향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윤 선생님의 평가는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윤건차〓이런 분류 자체에 무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린 지식인 지도는 제 스스로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 일본 근 현대 사상을 공부하다가 자연스레 한국에도 관심을 갖게 됐지요. 제일 먼저 한국 사상계의 전체적인 구도를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자기가 속한 집단과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만 알지 전체적 윤곽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2년에 걸쳐 자료 수집을 하고 1년 동안 그 책을 썼지요.
▽김〓선생님은 저를 ‘좌파적 시민사회론’에 분류해 놓으셨더군요. 제 입장은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것인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자유적 시민사회론’에 대비되는 ‘비판적 시민사회론’이 더 적절치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념적 지형도는 좌파, 중도파, 우파 등으로 나눠지지만 실제로 선생님께서 제시한 경계선으로 나누기 어려운 그룹들도 있습니다.
▽윤〓사실 저 자신을 이 지도에 집어넣는다 해도 진보적 민족주의,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시민사회론, 급진적 민주주의론, 비판적 자유주의 등 여러 군데 다 속할 수 있어요. 이런 구분에 많은 무리가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구도를 그리지 않으면 전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김〓선생님의 시도는 그동안 한국의 진보주의 담론이 무엇을 해 왔는가에 대한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진보주의적 인문사회과학은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했고 그 후 짧은 시간에 비약적 발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의 진보적 급진 담론이 우리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치적 실천을 강조해 온 진보적 담론들이 실제로 정치적 실천에 뿌리를 내린 것인가, 그리고 거대담론에 집착한 나머지 가족, 성차별 등 미시적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 대응을 못한 것이 아닌가 등 반성의 여지도 많았습니다.
▽윤〓저는 일본에서 조선인이 왜 차별 받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민지 경험과 민족 분단입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와 연관돼 있지요. 이런 역사흐름과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지식인들 모두 이 점이 부족합니다. 전문화 개별화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공부하더라도 역사흐름과 사회구조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지금 관심사에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김〓우리는 이른바 ‘압축 근대’라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식민지 경험을 비롯한 과거는 여전히 미완의 역사로 존재하고 민족통일이라는 미래의 과제까지도 안은 채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런 특수성에 더해 정보화와 세계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과거처럼 공동체적 민족주의만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우리 현실로부터 벗어난 시민적 보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최근 권혁범 임지현 교수 등이 제기하는 민족주의 비판은 우리 역사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민족주의를 아예 버리자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습니다.
▽윤〓공감합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째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동시에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국민국가 역시 넘어서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있습니다. 분단 상황이라고는 해도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이 이렇게 적대시되는 사회는 없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니 제3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 현실을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그래도 일본에 비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밝습니다. 한국에는 식민주의 청산이나 남북통일 같은 중요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물리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합니다. 천황제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중지 사고중지를 하고 이야기를 안 합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에 연관돼 있고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는 일본의 어떤 문제도 풀기가 어렵지요.
▽김〓그런 의미에서 한국 지식인들은 자기혁신이 필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현재 지식인 사회는 정부 정책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과, 상아탑에 안주하는 지식인 등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을 넘어선 ‘제3세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현실에 뿌리를 박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새로운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지식인사회의 분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윤〓한 미, 한 일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강력히 보여줌으로써 미국과 일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서도 상대가 해야 우리도 한다는 식이 아니라 ‘필요하면 우리가 다 하면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한다‘는 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한국에는 세계의 모순이 집중돼 있는 만큼 세계의 시선도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한국인, 특히 지식인들은 세계사적으로도 큰 역할을 할 겁니다.
<정리〓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