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곽경택감독 가족의 추석이야기

  • 입력 2001년 9월 30일 22시 31분



‘추석 아이가. 다 모이라.’

전국 관객 800여만 명으로 한국 영화 흥행의 역사를 바꿔놓은 ‘친구’의 곽경택 감독(36). 그의 가족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그 경사에는 ‘친구’의 대박만 있는 게 아니다.

곽 감독의 부친 곽인완씨(68·의학박사)는 최근 자신의 인생체험담을 엮은 수필집 ‘소의 눈물’(다리미디어)을 펴냈고, 여동생 신애씨(33)는 영화사 ‘청년필름’의 기획실장으로 자체 제작한 첫 작품 ‘와니와 준하’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다.

곽인완씨가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 출장을 다녀온 곽 감독, 영화 때문에 얼굴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딸 신애씨를 보기 위해 최근 모처럼 서울에 올라와 강남구 삼성동 곽 감독 사무실에서 영화와 명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보따리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영화로 먹고사는 사람이 셋이나 있어 한번 모이면 영화, 고향,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로 왁자지껄해요.” (곽경택 감독)

곽 감독이 운을 떼자 해마다 추석 무렵 부산 서구 동대신동 곽인완씨 집에 모여 가족들이 정겨운 한때를 보내던 장면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스르르 펼쳐진다.

갑자기 신애씨가 “근데 내는…”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신애씨는 “‘와니와 준하’ 개봉을 준비해야 하고 윤진이 아빠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 이번엔 못 내려갈 것 같다”고 말했다. ‘윤진이 아빠’는 ‘해피 엔드’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33).

신애씨는 ‘친구’에서 곽 감독이 극중 상택(서태화)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여동생의 모델이 된 인물. 영화 속 상택이 학교 때문에 이사간다는 말에 “그라믄 내는?”이라며 앙칼지게 대들던 그 ‘가시내’ 분위기와는 다르다.

“그래 할 수 없지. ‘와니, 주니’는 좀 어떠냐.”(곽인완씨)

“아니, ‘와니와 준하’요. 김희선이가 주인공인데 영화 괜찮습니다.”(곽신애씨)

영화 제목이 섞이는 순간 신애씨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97년 ‘술 먹고 취하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인완씨 지론에 따라 술이 약한 정지우 감독은 술 먹고 토해 가면서 결혼을 승낙 받았다.

추석. 명절이 되면 인완씨의 속내는 복잡해진다. 그는 50년 12월5일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

“부모님과 8남매가 살던 고향이었어요. 급히 떠나느라 가족에게 연락도 못했지만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다른 배를 탄 둘째형을 부산에서 만나 겨우 외톨이 신세는 면했지요.”(곽인완씨)

50여년 생이별의 한이 담겨 있는 농담이 있다. 곽 감독이 97년 ‘억수탕’으로 데뷔하자 인완씨는 아들과 술상을 마주한 채 이런 말을 했다.

“경택아. 다음엔 꼭 ‘김정일’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찍고 주인공은 니가 해라. 니가 김정일이랑 꼭 닮았거든. 그러면 김정일이가 ‘야, 나랑 이렇게 닮은 놈도 있느냐’ 하면서 우리를 초청하지 않겠니?”

이런 말도 오갔지만 당초 인완씨가 가진 자식들에 대한 바람은 다른 것이었다. 3남매가 자신들이 원했던 대로 의사(경택씨)-국문학자(신애씨)-변호사(규택씨·31·검사)가 되는 것. 결국 막내인 규택씨만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인완씨는 “‘큰 놈(곽경택 감독)’이 의대를 그만두고 영화 한다고 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식을 때렸다”면서 “결국 자식 셋 중 둘을 영화에 뺏겼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밖에 없는 사위도 영화 감독으로 얻었다”고 말했다. 인완씨의 ‘영화 유감’이다. 이에 신애씨가 “아버지는 영화에 자식 둘을 준 대신 영화를 얻었다”고 반박한다. 곽 감독은 한술 더 떠 “내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아버지를 닮은 이야기꾼 기질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다.

“영화감독은 우선 이야기꾼이라는 내 생각은 아버지의 영향 덕분입니다. 책으로도 나왔지만 ‘앉아 보라우’ 하면서 시작되는 아버지의 경험담은 정말 재밌습니다. 밥상머리에서 수백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빨려들어요. ‘억수탕’ ‘닥터 K’의 시나리오를 보고 걱정하던 아버지가 ‘친구’ 때는 ‘무조건 성공한다. 돈 있으면 내도 투자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웃음)

마침 ‘친구’를 찍다 친구가 된 유오성(36)이 곽 감독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들이 같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 ‘챔피언’은 세계 타이틀전에서 숨진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곽 감독이 연출을, 유오성이 타이틀 롤을 맡았다. 엉겁결에 함께 사진을 찍게 된 유오성은 “아버님, 바쁜 정지우 감독 대타입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곽 감독은 “불꽃같이 살다간 김득구 선수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어서 그런지 요즘 희망이란 글자가 더 생각난다”면서 “독자 여러분도 추석 명절 그 글자를 가슴에 꼭 새기고 나누며 살기를 바란다”며 명절인사를 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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