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한밤에 책 고르는 재미"…씨티문고 '국내 첫 심야영업' 호응

  • 입력 2001년 9월 23일 18시 28분


《“야근 끝나고 잠깐 들러 요즘 무슨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는지 한번 둘러보고 집에 가요.”

“남자친구와 밥 먹고 영화본 뒤 소설책이나 어학서적을 사러 가끔 들러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지하철 2호선 강남역 4거리. '놀고 먹고 마시는 유흥의 거리’로 불리는 ‘강남역 4거리’에 조용하지만 의미있는 변화가 일고 있다.

국내 처음으로 심야서점 개념을 도입한 ‘씨티문고(02-539-6868)’때문이다. 이달초부터 매일 오후 9시면 문을 닫는 기존 대형서점의 영업 관행을 깨고 24시간 편의점 개념을 도입, 오전 2시까지 ‘심야영업’을 시작한 이곳엔 요즘 야간시간(오후 9시∼오전 2시)대에만 하루 평균 160명의 손님이 찾아온다. 야간 하루 평균 매출액은 210만원정도.

해냄출판사 대표이사로 서울시내 3곳에서 씨티문고를 운영하고 있는 송영석 사장(49)은 “오후 9시 이후 강남역 일대 심야 유동인구가 20, 30대만 하루 평균 3만∼5만명에 달해 조만간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면서 “강남본점의 심야영업이 성공을 거두면 돈암점과 이대점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데이트 코스로〓씨티문고를 이용하는 주 고객은 30대 직장인 남녀. 20일 오후 9시40분 미국 테러사건 이후 세계의 관심 대상이 된 이슬람 문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서점에 들른 완구회사 세바토이㈜ 직원 진영조씨(35). 그는 “씨티문고가 심야영업을 하기 전에는 오늘처럼 야근을 마치고 책을 산다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고 말했다.

수업 자율학습 학원수강 아르바이트 등으로 낮시간이 자유롭지 않은 중고생 대학생들도 곳곳에 눈에 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불곡고 3학년 신모양(19·서울 서초구 신원동)은 “학교 수업은 오후 4시에 끝나지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면 오후 10시가 된다”면서 “이 시간에 동네 작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보면 주인 눈치가 보이는데 여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좋다”고 말했다.

지적인 데이트 코스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남자친구 엄현수씨(24)와 함께 학교 숙제에 참고할 책을 사러온 김소예씨(22·여·경원대 경영학과 3년)는 “집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이어서 교통편이 밤 11시반이면 끊긴다”면서 “서점에서의 데이트는 카페나 오락실에서의 만남보다 생산적이고 뿌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씨티문고 김현숙 차장은 “애들 손잡고 오는 가족 단위 손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가능성〓출판업계도 촉각을 세우고 씨티문고 심야영업의 성공여부를 지켜보고 있다. 대형서점 경영에 ‘시간’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기 때문.

다우출판사 고용석 대표는 “서점의 수를 늘리는 기존의 경영기법은 새로운 독자를 일부 창출하지만 결국 기존 독자를 나눠 먹는 것에 불과했다”면서 “하지만 심야로 영업시간을 늘린 것은 절대 독자의 수를 늘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강남역 일대의 특성상 술집 등 유흥 오락이나 영화 비디오 등 다른 매체로 갈 수 있는 독자를 흡수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토요일 손님 적어〓가장 손님이 몰리는 시간은 오후 9∼10시. 심야영업을 시작한 3일부터 19일까지 하루 평균 80명이 찾아 한사람당 1.6권씩을 구입했다. 평균 매출액은 133만5000원으로 밤 12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평균 매출액(19만9000원)의 6.7배에 달했다.

주간 매출은 월, 화요일이 괜찮고 금요일이 가장 적은 반면 심야 매출은 목, 금요일이 좋고 토요일이 적었다. 연령대별로는 10, 20대 고객이 각 3.4%, 5.3%씩 늘어 중고교 대학생들이 심야 고객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심야서점 200% 즐기기▼

씨티문고에 ‘편의서점’ 개념을 도입한 ㈜씨티문고 박길부 이사(59)는 “평소 시간에 쫓겨 여유있게 책을 보지 못한 사람이 쉬는 전날 이용하면 좋다”말한다. 박 이사가 말하는 ‘심야서점 200% 즐기는 법’을 소개한다.

▽10시 이후 이용하라〓손님의 절반은 오후 9∼10시에 몰린다. 이 시간 이후에는 붐비지 않아 넓은 공간에서 여유를 갖고 책을 고를 수 있다.

▽직원을 활용하라〓7명의 직원이 각 2개 분야씩 13개 분야의 안내를 담당하고 있다. 궁금한 점이나 찾는 책이 있으면 바로 직원에게 얘기하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

▽강남4거리 인프라를 이용하라〓씨티문고 인근에는 씨티 주공공이 극장과 파고다학원 시사영어사 민병철어학원 등 어학원, 아이겐포스트 후아유 지오다노 등 옷가게가 몰려있다. 이들 공간과 연계해 스케줄을 짜면 보다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심야버스를 이용하라〓새벽 2시반까지 강남역에서 천호동 동대문 등을 오가는 심야버스가 운행되므로 이를 잘 활용하면 귀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서점서 만난 정호진씨 "밤에 즐기는 문화 늘었으면…"▼

“서점뿐만 아니고 극단 등 밤에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20일 오후 10시 씨티문고에서 만난 정호진씨(24·여)는 소설책 읽기에 푹 빠져 있었다. 올 2월 원광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4월 상경한 그는 서울 성동구 답십리의 집에서 50분이나 걸려 이곳을 찾았다고 얘기했다.

“취직 준비를 위해 오후 2시까지 영어학원을 다니고 오후 5∼9시까지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서점에 갈 여유가 없어요. 밤에도 맘놓고 책을 접할 수 있는 심야 서점이 좀더 생기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3, 4회 씨티문고를 찾는 정씨는 “강남역 4거리에 처음 왔을 때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술집 밥집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하지만 이곳에 오면 시끌벅적한 바깥과는 달리 ‘고즈넉한 독립공간’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지방에서 조그만 서점을 운영, “어릴 때부터 책을 구입하는 것보다는 틈날 때마다 서점에서 조금씩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며 멋쩍게 웃었다.

<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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