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50돌 대담]김학준-와다 하루키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29분


《동아일보사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4층 콘퍼런스홀에서 부설 21세기 평화재단 평화연구소와 한국정치학회, 한국전쟁연구회,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공동 주최하는 5개국 학술회의 ‘한국전쟁과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모색’을 후원한다. 이에 앞서 23일 이번 학술회의에 참가하는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과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간의 대담을 통해 6·25전쟁의 의미를 짚어보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모색해 봤다.》

▽김총장〓와다교수는 일본학계에서 한국전쟁 연구분야의 권위자이자 러시아 전문가입니다. 와다교수께서는 몇 해전 ‘조선전쟁’이란 저서를 내놓으면서 남북 사이의 ‘역사적 화해’를 제의한 바 있지요. 6·25전쟁 발발 50주년에 즈음해 이 전쟁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와다교수〓제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전쟁은 남북간 ‘내전’으로 시작됐습니다. 남북 모두 자신의 주도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민족주의적 열정 아래 무력을 증강시키며 38도선을 둘러싸고 충돌하다가 북쪽이 ‘남진공격’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 군사력은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58대를 중심으로 남한 군사력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미 동서 양 진영간의 국제냉전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미국 소련 중국이 개입해 곧바로 ‘국제전’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김총장〓저도 6·25전쟁을 ‘내전 성격의 국제전’으로 봅니다. 당시 한반도에 내전적 요소, 예컨대 계급과 이념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94년 공개된 옛소련 자료들을 보면 소련과 북한에 의해 전쟁이 계획되고 추진됐음이 명백합니다. 소련은 거기에 중국을 끌어들입니다. 이 전쟁의 중심에 소련이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 사실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특히 소련은 공군 참전 등의 파병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자 했습니다. 한가지 흥미 있는 일은 미국정부는 당시 소련 참전을 알았으면서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정부는 이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와다교수〓이 전쟁에 일본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미군은 전쟁기간에 일본 군사기지를 활용했습니다. 한반도로 출격한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 군사기지에서 출발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LST 함정들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김총장〓6·25전쟁은 중국의 참전으로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으로 북한이 소멸위기에 처했을 때 중국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합니다. 이때부터 이 전쟁은 중국과 미국간 전쟁으로 바뀝니다. 이 전쟁을 북한 소련 중국의 3자관계에 맞춰보면, 서로간 국가이익의 상충이 두드러집니다. 북한은 남한 전체의 점령을 강력히 추진한 데 반해 중국은 대체로 38도선을 넘어서서 조금 더 점령한 다음 정지하려 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활발히 제기된 휴전안을 고려했던 것이지요. 소련은 때로는 남한 전체의 점령을 지지하다가 때로는 반대하는 등 혼선을 드러냅니다. 결국 38도선 주변에서의 휴전이라는 선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갑니다.

▽와다교수〓휴전회담은 무려 2년1개월 동안 계속됐습니다. 전쟁기간이 1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휴전회담 기간이 그렇게 길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포로송환문제가 휴전회담의 진전을 가로막은 중요한 장애물이었습니다. 미국은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이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산군측은 전원 자동송환돼야 한다고 맞섰지요. 이 논쟁에는 이념적 논쟁이 개입됐고,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냉전이 진행됐던 셈입니다.

▽김총장〓이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추산으로는 북한은 인구의 28.4%인 272만여명을 사망과 난민으로 잃었고, 남한은 133만여명을 주로 사망자로 잃었습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무고한 양민이 참으로 많이 학살됐습니다. 미국은 사망 실종자를 합쳐 6만3000여명의 희생자를 냈고, 중국은 100여만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남북 모두 국토 파괴와 재산 손실 역시 매우 컸습니다. 특히 남과 북 사이의 사회적 이질화를 한층 더 확대시키고 고착시켰습니다. 남북 모두 군사력 증강쪽으로 국가경영의 방향을 잡아 군사국가화의 길에 들어선 가운데 대결구도를 굳혔습니다. 남북 모두에서 흑백논리가 지배해 중도노선, 말하자면 ‘제3의 길’은 설 땅을 잃었습니다.

▽와다교수〓한국전쟁을 중미간의 전쟁으로 좁혀보면 무승부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중국 입장에서는 비록 희생이 큰 전쟁이었지만, 미국과 대등한 싸움을 벌임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만(중화민국)도 전쟁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로 일본과 국교를 맺고 그 지위를 확립했지요. 그러나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정치체제와 경제기초가 이 전쟁중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반도의 비극위에서 전후 일본의 발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총장〓이 전쟁은 1953년에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됐으며 그 뒤 오늘날까지 한반도에는 휴전협정체제가 유지되면서 남북관계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휴전협정은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전쟁은 진정으로 법적 제도적 완결을 보게 되겠죠.

▽와다교수〓그렇습니다. 저는 평화협정은 근본적으로 남과 북 사이에서 맺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국과 중국도 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96년 이래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 열려 왔습니다만, 이 회담은 궁극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참여하는 6자회담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회담의 산물인 5개항 남북공동선언은 큰 흐름으로 볼 때 잘 됐습니다. 남북이 자주적으로 화해 평화 통일로 함께 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믿습니다. 한민족이 참으로 어려운 과제를 잘 성취함으로써 세계가 코리아를 새롭게 주목하게 됐습니다.

▽김총장〓확실히 민족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경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가 많습니다. 남과 북이 진정으로 불신과 적대의식의 벽을 뛰어넘어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정리〓문철·부형권기자>fullmoon@donga.com

[김학준총장 약력]△미국 피츠버그대 정치학 박사 △서울대교수, 국회의원, 청와대대변인, 뮌헨대 객원교수 △현 동아일보 편집논설고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 한국정치학회장

[와다 하루키교수 약력]△도쿄(東京)대 서양사학과 졸 △도쿄대 연구원, 교수, 사회과학연구소장. 현 도쿄대 명예교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조선반도의 현상과 일본인의 과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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