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조용훈]이종상 그림 「대지」

  • 입력 1999년 5월 21일 19시 28분


그림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다. 호흡조차 불편하다. 대담한 필세가 몸마저 차갑게 굳게 만든다. 포악한 붓질이 가슴을 헤집고 지난 자리에는 전율뿐이다. “어, 어”하는 순간 시선을 강탈하는 생동하는 힘이 그저 놀랍다.

그 힘에 굴복한다. 복종한다. 한용운의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복종’)하다는, 자유보다도 아름답다는 그 복종이다.

이종상의 원(源)형상 시리즈 중의 하나인 ‘대지’라는 작품. 붓질이 휘몰아친 곳에는 검은 피가 섬뜩 이곳까지 튀며 날린다. 노란 색조의 장판지만이 그 피를 넉넉하게 포옹할 듯하다.

묵(墨)은 스밈과 번짐이라는 화선지로부터 탈피하여 장판에 아크릴처럼 강렬한 파동을 형성한다. 산은 정점으로 치솟다가 휘몰이, 주체할 수 없어 역으로 방향을 튼다. 흰빛으로 산화한다. 운필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폭발할 듯 응축한다. 광택처럼 빛나는 황금빛 대지는 운필의 기운생동으로 천지개벽한다. 황금빛 대지는 거센 붓놀림 하나만으로도 장엄하게 살아난다.

장판과 수묵은 각자 개성을 분출하다가도 하나로 혼융한다. 17세기 프랑스 명상가 라 로시푸코가 ‘자신이 품고 있는 자신감이 다른 사람에 대한 신용을 싹트게 한다’ (명상집 ‘도덕적 반성’ 중)는 신뢰를 장판과 수묵에서 감지한다.

조용훈(청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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