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학년도 대입논술/경희대]

  • 입력 1999년 1월 8일 10시 08분


다음 대화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서 논점을 찾아 그 논점을 중심으로 <가>의 주장을 보완하고 <가>의 입장에서 <나>의 주장을 비판하여 논술하시오. <제시문>

가: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옛것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일이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혁명적인 이론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말입니까?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이론은 철저하게도 이전의 모든 것을 단절하고 있는데요.

나: 우리가 과학에서의 혁명을 말할 때에는 정확하게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플랑크의 양자이론을 생각해봅시다.

플랑크는 애초부터 기존의 물리학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아주 보수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극히 제한된 특정한 문제 해결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열복사의 스펙트럼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전 물리학의 모든 법칙을 총동원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것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여러 해가 필요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는 이전의 물리학 테두리를 벗어나는 하나의 가설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도 그는 부가적 가설로써 옛 물리학을 둘러싸고 있는 벽에다 자기가 뚫은 구멍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후 계속된 플랑크의 가설 추구는 물리학 전체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기에 이르렀던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고전적 개념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물리학의 영역 내에서는 변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적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즉 우선 좁고 윤곽이 확실한 문제의 해결에만 한정시킬 때, 그때에만 결실있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터무니 없는 짓입니다.

확립되어 있는 것을 모두 뒤집어 엎으려는 짓은 자연과학에선 다만 분별력없는 반미치광이 같은 광신자들만이-예컨대 영구기관(永久機關)을 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시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런 시도로부터 무엇이 나올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과학에서의 혁명이 인간 공동 생활에서의 혁명과 어떻게 비교 가능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성공적인 혁명은 다만 좁고 범위가 한정된 문제를 해결하고, 되도록 적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전의 저 위대한 혁명을 생각해 봅시다.

그 혁명을 일으킨 그리스도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하나의 중요한 목표에만 한정시키고 가능한 한 작은 범위에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작은 것이 어쩔 수 없이 변화되어야만 했던 그 작은 부분이 나중에는 거의 모든 생활양식을 자연히 변화시키고야 마는 큰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옛 형식에 집착하는 겁니까? 옛 형식들이 이미 새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다만 일종의 타성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견지되고 있는 사례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 어째서 그러한 것을 제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면 교수들이 여전히 중세적인 가운을 걸치고 대학의식전에 나타나는 행위는 참으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구습은 없애버려야 하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나: 그것이 반드시 옛 형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보기에는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이를 다시 물리학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옛날의 경험적 지식을 표현하는 고전 물리학의 공식들은 지금까지 항상 옳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올바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이 해박한 경험지식에 다른 형태를 부여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진자(振子)운동, 지렛대 법칙, 행성운동 등의 물리학에서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까닭은 이러한 현상의 세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지적한 가운데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이 옛 형식은 필연코 국민의 계급적 신분을 표시하는데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역사는 더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학식과 우수한 사고력을 지니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적절히 조언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경험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가운은 이와같은 생각을 반영하는 특수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 있어서도수백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운을 고집하느냐 아니면 좀 더 현대적인 형식으로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가운에 대한 많은 비판자들이 그 속에 표현되어 있는 경험 내용 자체까지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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