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東亞 신춘문예/동화 당선작]정리태‘굴뚝에서 나온 무지개’

  • 입력 1999년 1월 3일 19시 18분


노오란 초겨울 햇살이 외양간에 드러누운 누렁소 엉덩이 위에서 차츰 엷어지는 해질 무렵입니다. 곰보 지붕을 인 기와집 옆구리에 무뚝뚝하게 생긴 굴뚝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웬일로 뒤란 대밭에 사는 굴뚝새가 포르르르 날아와 굴뚝 위에 앉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든 손님이라서 굴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안녕, 잘 있었니? 우리 일가새야.”

“아니, 일가라뇨? 내가 왜 아저씨네 일가지요?”

“일가고 말고. 너희 부모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던?”

굴뚝새는 좁디좁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동박새가 우리 육촌이고, 콩새가 사돈의 팔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에이, 아저씨같이 움직일 줄도 모르고 날지도 못하는 굴뚝이 일가라는 말은 처음 듣네요.”

“이거 원….”

굴뚝은 기가 차서 쯧쯧 혀를 찹니다. 굴뚝새는 굴뚝새대로 뭐가 억울한지 꽁지를 발딱 세웠습니다.

“요즘 너희 부모들은 신세대 굴뚝새라더니, 다들 집안의 뿌리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너희들 이름이 왜 굴뚝새인지는 아니?”

“글쎄요. 다른 고운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멋없는 아저씨네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그래 나도 궁금해요.”

“멋없는 이름이라구? 오래 살다 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것도 집안 고손자뻘되는 새새끼한테서.”

“새새끼라 하지 말고 어린 새라고 불러 줘요.”

굴뚝새가 연거푸 꽁지를 발딱발딱 세우며 동동거렸습니다. 어린 굴뚝새하고 입씨름을 벌이다 저도 모르게 달아오른 굴뚝도 긴 숨을 한 번 토해 냈습니다. 굴뚝은 모처럼 자기를 찾아와 준 이 손님이 토라져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했습니다. 바르르 떠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날갯짓을 할 참이었습니다.

“그래그래, 내가 지나쳤다. 미안하구나. 그 대신 내 얘기나 끝까지 들어 다오.”

어린 새들은 옛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굴뚝새는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두 발을 모으고 앉아 굴뚝을 바라봅니다. 굴뚝은 외양간으로 눈길을 돌려 누렁소 엉덩이에서 슬며시 물러나는 햇살을 바라봅니다. 한참 기억을 덥혀야 이야기가 흘러나올 모양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이 뒤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세지만 말이다. 아득한 너희 조상 새들이 날던 시절에는 나도 떵떵거리며 지냈던 몸이야.”

“떠엉떠엉거리며? 아저씨가요?”

“그때는 무엇이 되었든 끓이거나 삶으려면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거든. 세 끼 밥 짓고 국 끓일 때는 물론이고, 밤이면 군불이라는 것을 지펴서 온돌을 따뜻하게 달구어야 했으니까.”

그 때는 그랬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연기는 모락모락 굴뚝을 기어올라 하늘로 날아가곤 했습니다.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굴뚝은 온종일 연기를 흩뿌렸습니다.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굴뚝들이 서로 뿌연 연기 숨을 내쉴 때면 목이 칼칼해지는 고소한 냄새가 온 마을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행여 굴뚝이 숨을 잘 쉬어 주지 않을까 싶어 한결같이 조심스레 모시고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그 무렵 언제부턴가 싶구나. 유난스레 추위를 잘 타는 너희네가 나한테 와서 언 몸을 녹였다 가곤 했지. 아직 너희네는 마땅한 이름도 없을 때였다. 사람들은 굴뚝에 드나들며 복을 많이 받아 가는 새라고 해서 너희네를 ‘굴뚝새’라고 붙여 불렀지.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된 너희 조상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줄지어 굴뚝을 몇 바퀴씩 돌고, 참말 요란했다.”

어느새 굴뚝새는 꽁지를 내리고 다소곳해졌습니다. 갈라진 굴뚝 벽돌 이음새에 가만가만 부리를 비벼 봅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앉았을지도 모르는 바로 거기입니다. 그 틈새에는 용케도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말라 버린 며느리밥풀잎이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전 안테나 버팀대 노릇도 못하는대요. 아저씨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요?”

굴뚝새는 머뭇머뭇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물론이지. 그냥 비나 들치고 할 뿐이야.”

“굴뚝 아저씨를 다시 찾을 날이 올까요? 아저씨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닐까요?”

“결코 찾지 않겠지. 편한 맛을 보았거든. 저기 저 신기한 전기며, 가스며, 기름이며 좀 보렴. 다시는 날 올려다보지 않을게다.”

굴뚝은 굴뚝새의 초롱한 눈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굴뚝새의 눈망울에 반짝 물기가 어렸습니다.

“편한 것은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요?”

“저만 편하게 숨쉬려다가는 마침내 나무, 꽃, 강물, 그 아무도 숨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편한 게 독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야 그런 것을 거들떠보기나 한다니?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려고만 안달인 걸.”

“굴뚝 아저씨가 사람들 일을 어떻게 다 알아요? 밤낮으로 여기만 서 있는데.”

굴뚝새는 또 한번 바짝 대들어 봅니다. 굴뚝도 질세라 대뜸 목소리를 높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다. 큰 키는 두었다가 무엇에 쓴다니? 아직 허리는 별로 안굽었단다.”

연기 숨을 멈춘 뒤부터 굴뚝은 새 길을 내다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아직도 동네에서 키가 큰 축에 속하는 굴뚝은 정자나무 아래로 난 새 길까지도 훤히 바라다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흙길이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생긋 웃음을 나누며 오가더구나. 그런데 길이 넓어지고, 까만 아스팔트를 발라 다진 뒤로는 통 밝은 낯을 못 봤어. 그저 쌩쌩 소리만 들리지. 뿐인줄 아니? 무너져라 우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하얀 구급차가 들이닥치고, 어휴, 여간 끔찍한 게 아니던 걸.”

“사람들은 그걸 ‘발전’이라고 말하던대요. ‘발전’이 중요하대요.”

굴뚝새는 엊그제 감나무에 앉아 엿들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날 동네 사람들은 벌건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며 ‘발전, 발전’이라는 낱말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된 마당에 발전이라…. 글쎄다.”

외양간에서 누렁소가 ‘음매애’하고 울었습니다. 어느새 해는 멀리 땅 끝으로 주저앉고 누렁소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검붉은 노을이 머물러 있습니다. 굴뚝새는 날개를 접고 투박한 굴뚝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굴뚝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 보려무나. 어린 굴뚝새야.”

“오늘 제가 놀러 온 것은 말이죠.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에요.”

“마지막 인사? 너희네가 어디로 이사라도 갈 모양이구나.”

굴뚝새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습니다.

“네. 향교 대밭으로 가려구요.”

“여기는 어때서? 지금 사는 대밭도 남향인데다 굼벵이도 많고, 또, 뭐냐, 외, 외양간 초가지붕에서 놀기도 하니 썩 나무랄 데는 없어 보인다만….”

굴뚝은 여느 때 같지 않게 말을 더듬었습니다. 더 보탤 말이 있을 법한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여기도 좋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만 사셔서 한가롭구요. 그런데요, 굴뚝 아저씨, 이 집이 헐린다는가봐요. 산너머 공단까지 가로질러 큰 도로를 낸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터랑 대밭 위로 지나간다나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도….”

굴뚝새가 기대어 있는 굴뚝너머로 불그스름한 저녁놀이 물들어 내렸습니다.

굴뚝새는 굴뚝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숨을 멈추고 가만히 날개를 떼어냈습니다. 살금살금 굴뚝을 기어 내려와 담장 위에서 비로소 호르르 날았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른 굴뚝새가 되돌아보니 굴뚝은 노을 속에 떠 있었습니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뱅뱅 돌고 있는 굴뚝 위에서는 무지개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 나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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