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 입력 1998년 12월 21일 19시 24분


차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남자가 아무런 이유없이 눈이 먼다. 이 갑작스러운 실명(失明)현상은 부서지는 파도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다. 눈 앞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중얼거린다. “이번엔 내 차례야….”

해냄에서 펴낸 사라마구의 최신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

소설은 그 어떤 특정한 시간에도 위치하지 않는, 바로 과거일 수도,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는 시간 속을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란 종(種)이 지닌 근원적인 모순을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그려낸다.

눈이 먼다는 것은 단순히 실명(失明)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所有)’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는 현대인에게 실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었을 때만이 진정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몸서리쳐지는 야만과 폭력 속에 내던져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에 대한 확신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작가는 눈 먼 두 여인과 유일하게 눈이 멀지않은 안과의사의 아내가 함께 목욕하는 장면을 통해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들은 서로의 몸을 씻어주면서 불현듯,비록 눈은 둘이지만 손이 여섯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손들이 합쳐지면 ‘세상을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된다.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에서 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하는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그것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바로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일지도 모른다. 정영목 옮김.해냄 펴냄. 8,800원.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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