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수산「회상의열차」동행기]우리동요에 눈물『울컥』

  • 입력 1997년 9월 11일 20시 43분


울지는 않으리라고 약속했다. 자신에게. 이 여행에서 「회상의 열차」라는 이름이 가지는 서러움과 분노 억울함을 넘어 동포의 오늘의 삶과 내일의 문제들에 동참하기로 했다. 마음을 나눠 내일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낮달마저 기우는 저녁 무렵 우리를 열차로 보내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수라 김 할머니(74)가 「고향의 봄」을 부를 때, 멀리 타슈켄트에서 온 오페라 가수 리나 김이 「비목」을 부를 때, 내 취재노트에는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볼을 적시는 눈물이었다. 만나는 분들마다 어찌 이리 「음전」하고 어찌 이리 「경위」들이 있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저 조상들의 삶을 어찌 이리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가. 『어디서 왔소』하는 물음에 『서울에서 왔습니다』는 건 대답이 아니다. 목이 메이는 내 손을 잡으며 『왜 이제야 왔노』 돌아오는 대답은 경상도 말투다. 『얼마나 고생하셨어요』라는 인사로 37년 당시 강제이주당했던 김해숙할머니(84)를 만난다. 대답은 그러나 『우리는 힘든 거 없었지』 저 신고(辛苦)의 나날이 고생이 아니다. 살아남았음이 행복이다. 『이렇게 될 줄 생각지 못했소』 조상이 떠나온 땅에서 이렇게 찾아올 걸 생각도 못했다는 말씀이다. 오히려 내 손을 잡으며 『「대잡」도 못하고…』하며 목이 메이는 그 손이 갈퀴처럼 굳어 있다. 함남을 떠나 연해주에 정착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14명의 아이를 낳으며 산 김할머니. 소련정부가 주는 「장한 어메」훈장을 두번이나 받았다. 쫓겨난 타슈켄트에서 아들 하나는 물에 빠져 죽고, 네 명의 아이를 잃었다. 「공기가 맞지 않아」 늘 아팠다. 죽어도 연해주로 돌아가서 죽자고 이주한 것이 56년. 먹을 것도 없이 바삐 살았다. 그래도 「아덜딸」 다 대학 보내고, 그 자식들이 「펜대」 움직이며 사는 게 지금와서의 보람이다. 일행인 성대경 강만길교수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회상이 아닌 현실의 열차라는 느낌,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동포와 직면한 문제들에 마음을 기울이자』 『주먹밥을 먹으며 가야 한다』는 길영근씨(한국기술정책연구소)의 말이 거기에 설득력을 싣는다. 우수리스크 아리랑농장에서였다. 한 참가자가 느닷없이 중국에서 노무자로 온 동포여인에게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인간 곱게 생겼소』 수박을 잘라 내놓으며 하는 말이다. 왜 이때 한국의 정치판을 떠올려야 하나. 『인간 곱게 삽시다』라는 말이 갖고오는 의미다. 서경석 목사가 목이 터져라 「아리랑」을 부르며… 떠나가는 블라디보스토크. 문득 「복합문화」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이들이 가지고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들에게는 없다. 무엇을 합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동포들을 만날 때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강제이주 60주년 기념행사에서였다. 등에는 「태권도」라고 한글과 영어로 쓴 도복을 입은 청년들이 격파까지 보여주지만 걸음걸이는 평양 병사의 몸놀림 그대로다. 그들이 우리를 환영하며 부르는 노래도 「반갑습니다」라는 평양산이다. 항공기 조종사였던 블라디미르 박씨(60)의 말이 앞으로의 한―러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돈을 「뿌수지」 말고 「뿔어나게」 해야 합니다』 어찌 돈 만이랴. 우리의 이 마음도 멈추지 말고 뻗어나가게 해야 하리라. 한수산(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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