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섭의 시네월드]잉글리시 페이션트

  • 입력 1997년 3월 13일 08시 18분


석양빛으로 붉게 물든 사하라 사막 위를 나는 2인승 경비행기에 두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영화상 12개 부문 후보에 오른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첫장면이다. 영화는 그로부터 장장 2시간40분동안 그 두사람은 누구이며 왜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지, 또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한다. 두사람은 사막의 지도 작성을 위해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헝가리 출신의 알마시와 비행기광인 남편을 따라 사막에 온 영국 귀부인 캐서린. 2차대전 발발 직전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는 불륜의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단순한 러브 스토리로 받아들인다면 그 긴 상영시간이 못내 지루할 것이다. 사랑은 애절하고 뜨겁지만 그 역을 연기하는 랄프 피네스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로버트 레드퍼드나 메릴 스트립 같은 국제적 스타가 아니며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남자의 회상을 통해 사하라에 펼쳐진 사랑과 배신과 열정의 과거를 반추해 나간다. 그 남자는 지금 2차대전 막바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버려진 수도원에 「영국인 환자」라는 잘못된 꼬리표를 달고 외모는 화상으로 참혹하게 그을려 변형되어 있다. 여기에 두려운 운명의 예감으로 고뇌하는 캐나다 간호사 한나와 폭발물 제거 책임자인 인도계 장교의 사랑이 중첩된다. 북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두개의 대륙과 현재와 과거로 설정된 두개의 시제, 그리고 두 유형의 사랑이 마치 서로를 밀고 당기듯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국에서 펼쳐지는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가져올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물들과 그 운명이 펼쳐지는 방식, 바로 기억과 회상의 서술방식에 있다. 영국 극작가 출신의 앤터니 밍겔라 감독은 시각적 스케일과 정교함으로 사막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황홀의 이중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감독의 연출력을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할리우드 일급 스태프의 영상과 음악이 뒷받침한다. 운명과 사랑 그리고 기억과 회상의 영화. 관객은 신비의 영상에 취해 극장문을 나선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영상의 마력을 잊지 못해 다시 보아야 할 영화가 「잉글리시 페이션트」다. 강한섭(서울예전 영화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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