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철학과 사상을 논하는 점에서는 무능하지만 감정과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는 천재적이다」. 영화계에 떠도는 금언 중의 하나다. 「은행나무 침대」로 반항적인 한국 신세대 여성들이 감추고 있던 허약한 감성대를 통해 세기말의 대중정서를 건드렸던 강제규 감독은 이제 한걸음 더 내딛는다. 그가 기획과 시나리오를 책임진 「지상만가」는 관객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하고 있다. 『생각하지 말라. 오직 느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 뿐이다』
영화는 천재 작곡가이지만 절망하는 광수와 「필생의 소원이 아카데미상 수상」인 정열의 남자 종만 그리고 광수를 무작정 사랑하는 음대 휴학생 세희의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신현준은 절망을 표현하는 눈빛으로 괴로워하고 이병헌은 숨이 헉헉 차도록 소리지르며 달리고 정선경은 이번이 자신의 캐릭터를 바꿀 절호의 기회라며 애써 지순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관객은 광수의 절망 이유와 종만이 왜 자신의 야망을 희생하면서까지 광수를 지키려 하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광수와 세희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에 빠지는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알더라도 이해할 수 없다. 시나리오는 「영화는 논리가 아니다. 그저 믿어라」고 고집을 부리고 연출은 현란한 영상과 감각적인 사운드의 종합으로만 영화를 펼쳐놓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과 책을 따분한 문자문화의 잔재라고 거들떠도 안보는 CF와 뮤직비디오의 중독자들이나 떨어지는 잎새만 보아도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지독한 센티멘털리스트들은 이 영화에 갈채를 보낼 수도 있겠다. 모션컨트롤 카메라시스템과 컴퓨터그래픽까지 동원하면서 공들여 만든 화면에는 속도감과 파괴력이 느껴지고 엄청난 러시 필름을 자르고 붙인 박곡지의 편집은 영화에 적절한 리듬감을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만가」는 아무래도 한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아주 긴 CF와 닮아보인다. 세련되고 현란한 영상과 사운드는 어두운 극장 공간을 융단폭격하지만 보통 관객의 마음 속에 공감을 주지는 못한다. 영화는 감정예술임에 분명하지만 감정과 감상은 구별되어야 한다.
강한섭(서울예전 영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