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라도 고국에…』70대 사할린동포 「死境의 귀국」

  • 입력 1997년 2월 11일 20시 17분


『죽더라도 고국에서 죽고 싶습니다』 11일 낮 12시20분 병색이 뚜렷한 노인 한 명이 휠체어를 타고 승무원의 도움을 받으며 김포공항에 내렸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무작정 사할린을 떠나 고국을 찾아온 朴亥東(박해동·77)씨. 사할린 한인노인회 회장인 박씨는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사할린 한인노인들의 영구귀국을 돕기 위해 이러저리 뛰어다니다 갑자기 쓰러졌다. 당시 잠시 입원했던 서울 보라매시립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사할린으로 돌아갔던 박씨는 현지 병원에 입원해 회복을 기다렸다. 그러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됐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의사의 통고를 받은 박씨는 『죽더라도 내가 태어난 고국에서 죽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따라 박씨의 주치의는 지난달 말 『한국에 뼈를 묻으려면 2월15일 안으로 서둘러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박씨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대한적십자사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적십자사측은 『병원이 준비되지 않아 11일 도착은 곤란하다』며 『18일 이후에 와 달라』고 연락했다. 그러나 사할린의 박씨 주치의는 『건강이 악화돼 11일까지는 항공여행이 가능하지만 그 후는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결국 『병원에 자리가 없어 여관에서 지내더라도 사할린에서는 죽기 싫다』며 부인 朴順子(박순자·67)씨와 함께 고국행을 강행, 이날 아에로플로트 SU680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경남 울산이 고향인 박씨가 「54년간의 억울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1943년 징용통지서가 나온 맏형을 대신해서 징용길에 오르면서부터. 부관(釜關)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닿은 후 홋카이도를 거쳐 사할린까지 갔다. 일본 면사무소 지도원이 「주식회사」라고 소개한 징용장소는 사할린에서 가장 큰 내연(內淵)탄광. 한인 징용노무자들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군수용 석탄을 캐냈다. 한달 평균 7,8엔을 받았고 나머지 임금은 모두 강제 저축당했다. 그러나 저축한 돈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정부는 올해 일본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사할린 영구귀국자를 위한 아파트와 요양원을 경기 안산과 인천시에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씨가 지난 92년부터 한일 양국을 뛰어다니며 노력한 결과다. 이날 김포공항에서는 「사할린 귀환노인 복지대책회」에서 보낸 젊은 사회복지사 한명이 안면도 없는 박씨를 쓸쓸히 맞았다. 『병원은 잡았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날 우여곡절 끝에 먼저 입원했던 보라매시립병원으로 간 박씨는 일단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은 뒤 어렵게 입원했다. 54년이란 긴 세월을 낯선 이국에서 떠돌다 자신의 태가 묻힌 고국땅에 「죽을 자리」를 찾으러 무작정 달려 온 박씨는 이날 자꾸만 『억울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宋平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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