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캐릭터열전]‘돈벌이 기계’ 아버지들이여, 바보 봉영규를 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16일 11시 57분



자연을 닮은, 그래서 꽃을 좋아하는 남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악한 현실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망가뜨릴 때 꽃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된 그는 맑고 순수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부른다. 탐욕스러운 욕망이 넘실대는 세상의 이치와 다른 자연의 숨결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몸짓을 본 세상 사람들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비추는 '바보'. 그 바보는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맑은 눈동자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남자 봉영규(정보석 분)다.

욕설만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라 믿는 어머니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반항의 눈빛을 보내는 아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종종걸음으로 시장통을 돌아다니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어 그는 행복하다. 비록 똑똑한 아들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창피해 하지만, 그건 별로 문제될 것 없다.

그는 어머니에게 효성 지극한 아들이자, 공부 잘 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부른다. 그래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바보'라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그저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기 과시의 허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을 복원시키는 재주로 상처 입은 인간을 치유하는 존재이다. 그의 손길이 닿은 꽃이 단 한 번도 시든 적이 없는 것처럼, 그는 자연의 숨결 그대로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질서가 아닌, 자연의 순리에 몸과 마음을 맡긴 그는 황량하고 거친 세상의 공기를 향기롭게 정화시키는 향기를 가진 한 송이 '꽃'이다.

'아이큐 70의 일곱 살 지능, 3급 지적 장애인'.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규정하면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 살고 싶어" 신발을 마이크 삼아 노래 부르며 행복을 만들어간다.

물론 장미꽃보다 아름다운 미숙 씨가 이기적이고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고, 그 사건 이후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 마루가 집을 나간 이후 더 이상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미숙 씨가 남기고 간 꽃 같은 '작은 미숙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잿더미 속에서 다시 또 푸른 싹이 돋아나는 자연의 순리처럼,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잿더미 같은 현실에서 '우리'가 된 작은 미숙이와 함께 아들 마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꽃을 가꾼다.

동화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비현실적인 존재 같지만 그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영규는 신자유주의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정물화 속의 '꽃'처럼 비록 현실에서 그의 살과 피를 느낄 수 없지만,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은 '돈벌이 기계'로 전락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가 돌아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보'라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보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아버지의 존재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식에게 군림하려는 가부장적인 권위 대신 자식의 아픔을 보듬어주려는 자상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존재감에 빛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식에게 군림하려 하지 않는 아버지로서 그는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손길로 기억한다. 세상 사람들이 '바보'라 손가락질 하는 아버지가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은 아들은 아버지의 손길은 물론 눈길마저 거부하며 인상을 찡그린다.

그런 아들의 마음이 가슴으로 들려오기에 아들이 잠 든 후에야 겨우 얼굴을 만질 뿐이지만, 그래도 아들 마루는 그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아들의 눈과 귀, 코와 입술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그의 손길은 우리 시대가 되찾아야 할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아버지의 '권위'가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영규의 자식 사랑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봉영규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이상향(理想鄕)에 지나지 않는다. 상처뿐인 여린 가슴을 감추기 위해 무지막지한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어머니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늙은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뛰어난 두뇌를 가진 아들이 지적 장애를 겪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현실에서 동화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무시하는 것처럼, 그의 가족들조차 꽃 같은 그의 맑고 순수한 영혼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늙은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린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저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뿐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세상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속 소리를 듣지 못할 때마다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자책할 때마다 가슴이 쓰린 것도 그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의 숨결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봉영규는 분명 유별난 존재이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그 속에 감춰진 비정한 칼날을 찾는 사이, 사람들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봉영규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장가 한 번 가본 적 없는 그가 여동생의 자식을 자기 아들로 키우고, 사랑하는 미숙 씨와의 신혼 첫날밤에 '엄마놀이'를 제안하는 봉영규에게서 현대인의 영악함 대신 바보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만큼 그는 순수하다. 자연을 닮은 그의 순수한 영혼은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던 미숙 씨가 그의 곁에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일찍이 가족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돼버린 아들 마루를 대신하여 그를 지켜주는 수호천사 봉우리(황정음 분)는 그가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 이유이다. 그는 봉우리와 함께 그악스러운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해준다.

그의 손길이 닿은 꽃들이 시들지 않는 것처럼, 허공을 휘젓는 것 같은 그의 손짓과 발길이 사람들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것이다. 봉우리는 아버지의 그런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봉영규는 이렇게 그의 딸 봉우리와 함께 황량하고 거친 세상 속에 꽃을 옮겨 심는 자연의 전령자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과 '글'과 '마음'은 별개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심리전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리부동한 언행과 달리 봉영규에게는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진심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봉영규와 대비되는 위선과 위악을 숨기기 위해 그의 맑은 영혼이 만들어내는 몸짓을 '순수함'으로 포장하여 세상 밖으로 밀어낸다.


그는 이렇게 바보로 불리지만,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에게는 효성 지극한 아들이며 세상의 허위의식과 맞서는 딸에게만큼은 듬직한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사랑하는 가족에게만큼은 바보가 아닌 것이다.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봉영규가 자본의 논리로 세상과 맞서는 현대인에게 '바보'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린 채 '돈벌이 기계'로 전락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돌아가고 싶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의 '아버지'가 바로 봉영규인 것 역시 분명한 진실이다.

부양가족에 대한 경제적 책임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향해 넘어질 듯이 허공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봉영규의 몸짓 속에 흐르는 자연의 숨결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족 간의 단절을 극복하는 대안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던진 연민과 슬픔의 눈망울을 호기심 가득한 맑은 눈망울로 전이시키기는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충만한 자연과 닮아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부르든 언제든 두 팔을 흔들며 달려올 것 같은 그는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마다 찾고 싶은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동화 속의 세상에서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래서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그의 꾸밈없는 몸짓과 맑은 미소에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 까닭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가 있어 행복한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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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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