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윤득헌/초중생의 '냉소'

  • 입력 2001년 5월 27일 18시 53분


고려시대까지 늙고 병든 노인을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른바 고려장이다. 이 고려장의 풍습이 사라진 이유를 민간설화는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나이 일흔이 된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버리고 돌아올 때 데리고 갔던 아들녀석이 그 지게를 다시 집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사내가 그 까닭을 물은즉 아들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아버지가 일흔이 되면 이 지게를 다시 써야 할 게 아녜요.’

▷마음은 원래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흰 종이 같은 것이고 정신이나 지식은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잘못 습득된 것에 대한 자기 치유(治癒) 능력은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흰 종이에 썼다 지운 글씨가 자국을 남기듯 초기의 경험은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교훈이 되고, 어린아이들 앞에선 냉수도 못 마신다는 말도 생겼을 터이다.

▷요즘 초중생들은 일상의 경험에서 큰 혼란을 겪는 듯 싶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사회 현실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실에서는 도덕을 배우지만 자녀에게 체벌을 가했다고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을 구타하는 학부모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게 된다. 교실에서는 국민의 의무를 배우지만 군 입대를 회피하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는 추한 어른들을 본다. 교실에서는 민주주의를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걸핏하면 날치기 국회요, 지저분한 선거다. 온통 진리를 비웃는 세상이다.

▷최근 부산 해운대구 선거관리위원회가 초중생 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20.3%가 유권자가 됐을 때 후보자가 제공하는 향응을 받겠다고 했다. 자칫 타락선거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들 초중생의 70%가 정치인들이 잘못한다고 답변한 것을 보면 ‘향응을 받겠다’는 것도 왜곡된 현실에 대한 냉소(冷笑)가 아닐까. 걱정해야 할 것은 ‘초중생의 냉소’를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어른들이 먼저 부끄러워할 일이다.

<윤득헌논설위원>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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