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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8월 5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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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야기가 있대.
―당신에게?
―몰라. 누구에게든 마찬가지겠지. 집으로 온다는 걸 보면…… 그런데, 당신 지금 이상하다는 거 알아?
전화가 온 뒤 정확하게 5분도 지나지 않아 영우는 벨을 눌렀다. 내가 나가서 문을 따주었다. 미흔은 긴장된 얼굴로 싱크대에 기대 서 있었다. 문을 여니, 영우가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나를 말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성큼 들어섰다. 그날따라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앞머리를 일본 여자애처럼 가지런히 내리고 뒷머리는 핀으로 올려 묶어 통통하고 흰 얼굴이 어느 때 보다 더 깜찍하고 깨끗해 보였다.
소매 없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아래엔 여전히 청바지 차림이었다. 샌들을 벗자 석류알처럼 새하얀 발톱들이 나왔다. 영우는 미흔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전 사장님 이웃 사무실에서 일했던 정영우라고 해요.
영우는 맥주가 든 쇼핑 봉지를 내밀었다. 미흔은 영우를 주방의 식탁에 앉혔다. 나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 재떨이를 챙겨들고는 그 곁에 엉거주춤 앉았다.
―사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미흔은 등을 보인 채 안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우가 미흔의 뒷모습과 불안해하는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처음처럼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심술궂고 교묘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피해온 탓에 거의 열흘만에 맞닥뜨린 셈이었다.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영우는 추파춥스 사탕때문에 약혼한 연인들이 헤어진 이야기를 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우리는 도심 한 가운데의 2층 맥주집에 앉아 있었어요. 아주 아주 추운 날이었지요. 내 친구의 약혼자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친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어요. 자기는 지금 바로 추파춥스 사탕을 선물 받고 싶다고. 오늘 밤 안에 꼭 추파춥스 사탕을 먹고 싶다고. 시간은 열두시였어요. 친구의 약혼자는 황당해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나갔어요. 그리고 새벽 3시에 빈손으로 돌아온거예요. 두 사람은 그 뒤로 만나지 않았어요. 결혼도 하지 못했죠. 그러다가 2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둘 다 아직 미혼이었어요. 그 날 남자는 내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가 추파춥스 사탕을 주었어요. 그 남자애의 책상 위에 추파춥스 사탕이 유리 항아리 가득 들어 있었대요. 둘은 곧 결혼을 했죠.
미흔은 재미있어 했다. 영우는 이미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온 것 같았는데도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다. 두 사람이 자주 웃었기 때문에 처제가 오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난 곧 떠날 거예요. 9월부터는 인천에 가서 애육원 보모가 될 거예요. 장애인 어린이 수용소죠.
―왜 그런 일을? 몹시 힘들텐데요.
미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에요. 아주 힘든 일을 태연하게 해보고 싶어요. 난 죄가 많으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영우가 다정한 눈빛으로 미흔을 마주보며 말했다.
―결혼은 안해요?
―……
영우는 대답 대신 나를 잠시 보더니 눈을 돌려 부엌 너머 거실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서른 한 평의 아파트는 평범하게 꾸며 졌고, 잘 청소되어 반짝거렸고 안정되어 보였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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