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47)

  • 입력 1996년 12월 19일 20시 43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21〉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네』하는 대답이 들린다.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며 나는 문 위에 붙은 「박지영 교수」와 「재실」이란 글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를 보더니 박지영은 반갑게 웃는다. 『성적 내러 나왔어요?』하더니 다음 순간 이내 얼굴을 흐리며 『별일 없죠?』라고 걱정을 해준다. 그러는 한편으로 순간 내 옷차림을 훑어보며 『그 머플러 어디서 샀어요? 왜 내 눈에는 그런 게 안 띄는 거지?』하면서 시샘을 하기도 한다. 나는 가방에서 사직서를 꺼내 심상하게 박지영의 책상 위에 놓는다. 『이게 뭐예요?』 『학과장이 방에 없네요. 박선생이 나중에 좀 전해줘요』 『뭔데? 강선생, 설마 사표 쓴 거 아니죠?』 놀람 때문인지 기쁨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지영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내가 묵묵히 가방의 지퍼를 닫고 일어서려 하자 내 팔을 붙들기까지 한다. 『강선생, 이러면 안돼요. 이런 때일수록…』 나는 박지영에게 마른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난 사람이 간교해서 질 것 같은 싸움은 미리 포기하거든요』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는 교수노릇이 안 어울려요. 박선생 같은 소신도 없고 열심이지도 않고…』 『학생들한테 인기는 많잖아요』 박지영은 순간적으로 뾰족하게 말하더니 이내 간곡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요. 강선생이 없으면 나 혼자 어떡해』 나를 붙잡는다기보다는 벌써 작별을 정해진 일로 받아들이고 아쉬워하고 있는 말투다. 나는 박지영을 위로한다. 『박선생이야 성격이 좋아서 누구하고든 잘 지내는데요 뭐』 『아무튼 서운해요』 『……』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박지영은 마치 사표수리를 하고 퇴직금을 주는 이사장이나 된 듯이 우아하게 격식을 차려가며 섭섭한 표정으로 나를 보낸다. 그러나 내가 방문을 닫고 나온 뒤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것은 굳이 콜롬보 형사처럼 인사까지 다 마치고 가는 척하다가 『아, 그런데 말이죠?』하면서 방문을 다시 한번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격투 끝에 칼자루를 빼앗긴 사람의 평화일까. 혹은 아무것도 붙잡을 것 없이 허공에서 추락하는 사람의 평온? 나는, 나는 또 살아갈 것이다. 내게 오는 다른 시간들을.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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