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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총동문회는 12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2012 신년교례회’를 열고 ‘2012년 자랑스러운 경희인상’을 시상한다고 9일 밝혔다. 수상 예정자는 서정섭 동신관유리공업 회장, 김성호 제양항공해운 회장, 문재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폭력조직 ‘서방파’ 부두목 출신인 이모 씨(61)의 대학생 아들 집에서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이 다량 발견됐다. 서방파는 1970년대 김태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국적인 폭력조직으로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호남지역에 기반을 둔 3대 폭력조직 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북부지검 형사5부(부장 이태형)는 코카인 24g, 엑스터시 553정, 대마 17g 등을 소지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이 씨의 아들(26)을 지난해 12월 31일 구속해 수사 중이라고 4일 밝혔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코카인과 엑스터시, 대마의 1회 투여량은 각각 0.05g, 1정, 0.5∼1g 정도로 이번에 발견된 마약은 1000명이 한꺼번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74·사진)은 김 고문이 타계한 지난해 12월 30일부터 발인날인 3일까지 끝내 빈소를 찾지 않았다. 경기지방경찰청 공안분실장을 지낸 이 전 경감은 1985년 김 고문이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 고문을 잔인하게 고문해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게 만든 인물이다. 김 고문이 파킨슨병에 걸린 것도 고문 후유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전 경감이 김 고문에게 마지막 사죄를 하기 위해 빈소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나왔다.동아일보 취재진이 이 전 경감을 만나기 위해 장례기간 5일 내내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그의 집 앞을 지키며 주변 지인들을 취재한 결과 이 전 경감은 김 고문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4개월 전부터 연락을 끊었고 성탄절 전후로는 아예 종적을 감췄다. 이 전 경감이 2008년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신학공부를 했던 합동개혁총회신학 정서영 총장은 “6개월 전까지 통화했는데 얼마 전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전했다. 그가 주로 갔다던 목욕탕 주인도 “한 달 전부터 이 씨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인들은 “이 전 경감 부부는 파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주변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들 부부는 지난해부터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을 내는 13.2m²(약 4평)짜리 허름한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한 파지수거업체 주인은 “매주 이 전 경감의 부인 신모 씨가 파지나 알루미늄 캔을 모아와 한 달 평균 10만 원가량의 돈을 받아갔는데 파지 양이 많을 때는 이 씨가 직접 손수레를 끌고 왔다”며 “신 씨가 인근 빌딩에서 환경미화원 일을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지난해 12월 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발인식이 3일 오전 7시 20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발인식은 영정 사진을 든 유족을 뒤따르던 지인 100여 명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김 고문과 1980년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50, 60대 참석자들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다 흐느끼기도 했다. 오전 8시 30분부터는 명동성당 본당에서 10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미사가 열렸다. 미사 마지막 순서에는 참석자 전원이 김 고문이 생전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불렀다. 노래가 절정에 달하자 참석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미사가 끝난 뒤 같은 장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에는 민주통합당 원혜영 이용선 공동대표와 고인의 경기고·서울대(65학번) 동문인 손학규 상임고문을 비롯해 이해찬 정동영 상임고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통합진보당 이정희 심상정 공동대표와 노회찬 대변인,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권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은 종로구 종로5가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다리(버들다리)’에서 10분간 노제를 지낸 뒤 장지로 향했다. 김 고문은 손 고문과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 삼총사’로 불렸던 친구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잠들어 있는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함께 영면한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민주화운동의 대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추모미사와 문화제가 영결식을 하루 앞둔 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미사를 집전한 김병상 신부는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본인의 고통을 감추면서 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며 “김 고문이 품었던 희망과 꿈을 공유하자”고 강조했다.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고인은 평화를 위해 살았고 정의를 위해 싸웠다”며 “이런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했다. 김 고문의 ‘평생동지’인 부인 인재근 여사에 대해서는 “인권 운동을 하실 땐 투사였다”며 “절망 속에서 (투병 중인) 남편에게 끝까지 희망을 심어줬다”고 평가했다. 고인은 임종 전날인 지난해 12월 29일 함 신부에게서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고 ‘즈카리아’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추모미사에 이어 오후 7시부터는 성당 내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민주통합당 원혜영 공동대표와 손학규 정동영 상임고문 등 정치권 인사를 비롯해 1000명이 넘는 추모객이 참석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을 비롯해 하금열 대통령실장, 김효재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이 다녀갔다. 영결식은 3일 오전 8시 명동성당에서 민주사회장으로 진행된다. 김 고문의 시신은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

지난해 12월 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는 2011년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과 새해 첫날인 1일에도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일에는 공동장례위원장인 함세웅 신부의 미사 집전과 함께 입관식이 열렸다. 김 고문,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 삼총사’로 불렸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1일까지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 지난해 12월 31일 낮 12시 10분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박 위원장은 “참 깨끗하신 분이었다”며 “나라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세상을 떠나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31일부터 1일까지 김형오 전 국회의장,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등 여권 인사들이 대거 조문을 다녀갔다. 손 고문을 비롯한 민주통합당 전현직 의원 100여 명이 빈소를 지켰다. 빈소 한쪽 벽면은 정치권 인사와 시민들이 김 고문에게 남기는 글을 적어 붙여 놓은 메모지 1000여 장으로 가득 찼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장례위원회’는 30일 하루 동안에만 2만여 명이 다녀가는 등 1일 오후 11시 현재까지 총 3만6000여 명이 빈소를 찾았다고 밝혔다. 김 고문과 악연(고문 수사)이 있는 경찰 내부에서도 추모 분위기가 있었다. 김 고문이 과거 고문을 당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내 취조실 문 앞에 인권보호센터에서 근무 중인 한 경찰관이 김 고문을 추모하기 위한 조화(사진)를 갖다놓기도 했다. 경찰청 미래발전과 이준형 경위는 경찰 내부망 등에 인권보호센터에 김 고문의 분향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는 글을 올려 경찰 상당수가 찬성 의사를 보였다. 한나라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도 김 고문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지는 않았지만 1일 자신의 트위터에 (김 고문이 고문을 당했던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있는) 남영동 일대의 사진과 함께 “이렇게 가까운데 한마디도 못해서 죄송해요. 나중에 받아주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하얀 종이 위에 부드럽게 솟은 점자를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점자가 모여 책이 완성될 때는 정말 감동적이죠. 점자책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22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점자도서관에서는 이상웅 씨(48)가 점자 인쇄기로 장애인 정보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걸려 오는 시각장애인들의 전화까지 받느라 분주했다. 법원에 가는데 동행해 달라는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 씨는 비상이라도 걸린 듯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가 몇 시간 뒤 돌아오기도 했다. 이 씨는 도서관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관장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은행원이다. 국민은행 전산부 23년차 직원인 그는 지난해 초부터 관장 역할을 하며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야간 근무를 하는 그는 이날도 전날 오후 5시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일을 마친 뒤 바로 도서관에 나왔다. 격일 근무를 하는 탓에 아침에 근무가 끝나면 하루는 아예 잠을 자지 않고 도서관에 나와 일을 한 뒤 밤에 퇴근해 7시간가량 이틀 치 잠을 몰아 잔다. 아침이면 다시 도서관에 나와 출근시간인 오후 5시 직전까지 봉사 활동을 한다. 점자책 제작, 시각장애인 차량 이동 봉사, 청소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2005년 설립된 점자도서관은 지난해 3월 폐관 위기에 처했었다. 설립자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문을 닫으려 했던 것. 시각장애인들은 설립 당시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던 이 씨에게 “우리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서관을 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선뜻 수락했다. 현재 관장은 1급 시각장애인이라 업무 수행에 다소 어려움이 있어 이 씨가 업무의 상당부분을 처리하고 있다. 그는 “점자를 찬찬히 짚어가며 책을 읽는 시각장애인들을 보면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씨의 고민은 늘 돈 문제다. 서울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올해 지원금은 3600만 원에 불과했다. 점자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일반 책 5배의 비용이 드는 탓에 제작비와 임차료 등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그 바람에 그의 아내가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무보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제작비가 모자라 의뢰받은 서적을 점자책으로 만들어 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적도 많다. 기자가 도서관을 방문한 이날도 난방기기가 고장 났지만 새로 살 돈이 없어 작은 온풍기 하나로 추위를 이기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렵게 행사 후원금 300만 원을 유치해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재능 콘서트’를 기획했다. 노래 악기 연주 등 예능 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난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사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는 행사에 재능 있는 시각장애인들을 출연시킨 다음 출연료를 지급했다. 예능인을 직업으로 삼아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도서관이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시각장애인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서관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오래전부터 골프를 즐겼던 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63·사진)은 10월 중순 경기 파주시의 한 골프장을 찾았지만 올해 첫 라운드이었던 탓에 공이 번번이 빗맞았다. 그러다 세게 휘두른 공이 멀리 빗나가 70m쯤 떨어져 서 있던 캐디(골프경기보조원) 황모 씨(25·여)의 귀에 정확히 맞았다. 유 전 의원은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황 씨의 왼쪽 귀는 벌겋게 부어 있었다.골프장 업주는 유 전 의원에게 “관리 책임은 우리에게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해 유 전 의원은 “일단 차비라도 해서 병원에 가라”며 20만 원을 준 뒤 라운드를 이어갔다.그러나 황 씨는 유 전 의원을 16일 과실치상 혐의로 서울 도봉경찰서에 고소했다. 공에 맞아 전치 6주의 상해를 입고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상태인데도 20만 원을 준 것 외에는 모든 책임을 골프장에 떠넘겼다는 것이 황 씨의 주장이다. 경찰은 조만간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할 계획이다.유 전 의원은 동아일보의 통화에서 “사고 이후 수차례 황 씨 어머니와 연락하며 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지를 논의하고 병의 경과를 묻는 등 책임을 다하려 애썼는데 고소해 당황스럽다”며 “골프장 내에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캐디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관리자의 책임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천으로 가려져 있는 걸 본 순간 ‘북한에 정말 큰일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박영환 서울신학대 교수) 김 위원장 사망 당시 북한을 방문했다가 돌아온 대북지원 민간단체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관계자 10명이 21일 0시 40분경 인천공항으로 입국해 당시 북한 분위기를 전달했다. 박 교수 등 북민협 관계자들은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한 인터뷰에서 “사망 발표가 있던 19일 정오를 전후해 상황이 급변하면서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고 전했다. 북민협에 따르면 17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방북한 북민협 관계자 일행은 19일 오전 황해북도 강남군의 소학교와 탁아소를 방문하고 낮 12시경 평양으로 돌아와 점심식사 겸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다. 이때만 해도 동행했던 북한 측 안내원 3명은 일행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12시가 지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백화점에 나타난 북한 당국 관계자가 안내 참사들을 데리고 가 이야기를 나눴다. 이 관계자는 곧이어 일행에게 “숙소(보통강호텔)로 가달라”고 했다. 북민협 회원인 안향선 국제기아대책기구 사무총장은 “안내원들은 좀처럼 남한 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눈 주변이 벌겋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일행은 숙소로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호텔 입구 왼쪽 벽면에 걸려있던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연녹색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호텔 곳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안내원은 별다른 통보 없이 “호텔 내에만 있어 달라”고 말했다. 방으로 들어간 이들은 TV를 켜보고서야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을 알게 됐다. 박현석 북민협 운영위원장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덜컥 겁이 났다”며 “서울에 있는 가족이 걱정돼 ‘우리는 안전하게 잘 있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본 북한 사람들은 12시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며 “북한 주민들까지 다 아는 상황이었다면 우리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망 보도 이후 북한 방송에서는 김정일 애도 방송과 함께 ‘김정은 대장을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장면이 수차례 교차돼 방송됐다. 박 교수는 “북한 당국이 김정은이 나오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방송해 내부 불안을 서둘러 수습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북한 주민들은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20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들이 만난 주민들은 출근을 서두르는 등 보통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 관계자는 이들을 배웅하며 “큰일을 치르고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고 한다. 박 운영위원장은 “한 북한 관계자가 ‘우리는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이) 보도되는 걸 원치 않는다. 팩스로 남은 이야기를 나누자’라고 했다”고 전했다.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올해 대한민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관광대국’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한국관광공사는 16일 올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당초 목표치인 1000만 명을 아슬아슬하게 달성해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열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808만2500명. 공식 수치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달 방문객이 약 92만 명으로 지난달 말 9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또 하반기(7∼12월) 들어 관광객 수 증가 추세가 이어진 만큼 목표 달성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은 5000만 명 이상 관광객을 유치하는 프랑스 미국 스페인 중국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수치다. 하지만 이는 2010년 기준 세계 17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연 경승지나 문화 사적지가 적은 한국이 달성한다면 의미가 매우 깊다.특히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880만 명에서 1년 만에 10% 이상 늘어난 데다 이웃 국가인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지난해 860만 명 수준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수치라고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밝혔다.정부는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맞아 내년을 ‘한국 관광의 체질 개선 원년’으로 선포했다. 지금까지의 관광이 단순히 수도권 위주로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 그쳤다고 보고 앞으로 관광객 개인이 관심을 가질 테마별로 관광 코스를 묶는 ‘한국의 10대 테마관광 코스’를 선정해 적극 알릴 계획이다.문화부는 이날 10대 테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투어’와 ‘에코투어’ 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의 도래는 1978년 ‘방한 외국인 100만 명 시대’를 연 지 33년 만이다. 또 2000년 500만 명을 넘어선 지 11년 만이다.전문가들은 이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우선 한국은 섬나라나 마찬가지로 관광지로서는 매우 불리하다는 점이다. 또 관광대국이 많은 유럽과 달리 ‘경유 여행지’가 되는 경우도 드물다. 이런 난점을 모두 극복하고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케이스라는 것.가장 큰 원동력은 이미지 개선이 꼽히고 있다. 최근 10년간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선박과 반도체를 만드는 ‘산업 국가’에서 K팝과 한식으로 대표되는 ‘문화 국가’로 바뀌었다고 업계 인사들은 입을 모았다. ○ 1000만 명 원동력은 ‘한국 마니아’폭설이 쏟아진 2일 오후 7시. 강원 평창군의 ‘2011 한류위크 콘서트’ 공연장 맨 앞에는 싱가포르에서 온 제이슨 통 씨(42) 가족 7명이 아이돌그룹 애프터스쿨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통 씨는 “올해만 두 번째 방문으로 총 네 번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며 “딸들로부터 시작된 ‘한류’ 덕분에 온 가족이 한국 마니아가 됐다”며 웃었다. 국내 외국인 관광객이 1000만 명 돌파를 앞둔 것은 통 씨와 같이 몇 번이고 한국을 찾는 ‘한국 마니아’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마니아가 는 것은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외국인이 급증했기 때문이다.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을 찾은 관광객 1만2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을 네 차례 이상 찾은 관광객이 전체의 18.6%였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과 교수는 “2000년대 이후 향상된 국가 이미지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연 원동력”이라고 분석했다.○ 쇼핑과 관광이 ‘1000만 명 쌍끌이’10년 만에 관광객이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쇼핑과 관광이다.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이 찾은 방문지 1∼3위는 서울 명동,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순이다. 관광객의 쇼핑 욕구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세부 품목은 10년 동안 바뀌었다.16일 서울 명동에서 만난 기타가와 히토미(北川仁美·26·여) 씨는 “오직 화장품을 사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밝혔다. 그가 들고 다닌 화장품 쇼핑 가방만 5개. 실제 2006년까지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사는 물품 2위는 김치(24.7%)였지만 지금은 의류(37.2%) 다음으로 화장품(36.9%)의 선호도가 높아졌다.또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사적지가 10개나 등재되는 등 세계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지난해 관광지 방문을 위한 내한은 52.9%로 쇼핑의 60.9%에 약간 못 미쳤다.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놀거리’를 찾아 한국에 오는 관광객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까지 실태조사에서 따로 집계하지 않던 휴양, 유흥 및 오락, 카지노 등의 ‘놀거리’ 항목이 2010년에만 총 27.7%(중복 응답)로 집계됐다. ○ 양에서 질로 관광 패러다임 바꿀 때 전문가들은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맞아 정책의 목표를 양에서 질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관광공사에 따르면 관광산업의 ‘핵심’인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1인당 지출액은 1106달러로 9년 전인 2001년 1241달러보다 오히려 낮아졌다. 외국인 관광객의 지갑을 어떻게 열 것인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가장 큰 당면과제로 꼽히는 것이 지방관광 활성화다. 김현환 문화체육관광부 해외관광과장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인상을 각인시키고 관광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지방 관광 활성화가 매우 중요하다”며 “국내 10대 관광코스를 만드는 것도 그 이유”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평창=고현국 기자 mck@donga.com }

수원대는 이번 정시모집에서 나군과 다군으로 나눠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단과대학이 나군 모집단위에 속하는데, 음대만 다군 모집단위에 들어간다. 선발 인원은 나군이 1290명, 다군이 165명이다. 모든 모집단위에서 논술 및 면접 고사를 따로 치르지 않는다.인문사회계열과 자연계열은 수능 성적 70%, 학생부 성적 30%로 최종합격자를 가린다. 예체능계의 경우 미대는 수능과 학생부 성적 외에 실기 60%를, 무용학과 및 음대는 실기 80%를 각각 반영한다. 수능은 영역별로 3개만 반영한다. 인문사회계열 및 예체능계열은 언어·외국어·탐구영역의 백분위 점수를, 자연계열은 수리·외국어·탐구영역의 백분위 점수를 넣어서 전형한다. 탐구영역은 계열과 상관없이 사회·과학·직업 탐구 영역에서 1개 과목 성적만을 반영(간호학과는 2개 과목 반영)한다. 자연계열 지원자가 수리 가형을 선택할 경우에는 취득 등급 환산 점수의 5%를 가산점으로 주기로 했다.학교생활기록부는 과목별 석차 등급(9등급)을 환산 점수로 조정해서 전형에 반영한다. 인문사회 및 예체능계열에서 전형에 반영하는 교과목은 국어, 영어, 사회 또는 과학 중 하나다. 자연계열의 경우 수학, 영어, 사회 또는 과학중 하나만 넣는다. 학생부 성적은 1학년 30%, 2학년 30%, 3학년 40%로 반영한다. 정시모집에서 수능 성적의 백분위 평균이 일정 수준을 넘는 우수 신입생에게 4년간 전액 장학금 및 학비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수원대는 유럽식의 아파트형 주거공간 개념을 도입한 기숙사를 지었다. 각방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많은 학생이 이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이 기숙사는 최대 900여 명의 학생이 이용할 수 있다. 031-220-2352∼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회를 맞는다. 수요집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일 주제로 2002년 3월 13일 열린 500회 집회가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된 뒤 매주 기록을 경신하며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집회를 주최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 1000회 집회 당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를 형상화한 평화비 제막식을 연다. 또 이날 일본을 포함한 미국, 독일 등 전 세계 9개국 37개 도시에서 연대 집회를 동시에 열어 1000회로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 세계가 집중하게 할 계획이다.○ 1000번의 싸움…위안부 존재 알려 첫 수요집회는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열렸다. 정대협 등 여성단체 회원 30여 명이 모여 첫 집회를 연 이후 20년간 수요집회는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려왔다. 수요집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에서조차 ‘숨겨야 할 문제’로 왜곡돼있던 위안부 문제를 양지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수요집회가 시작되면서 할머니들은 스스로를 ‘말 못하는 피해자’에서 여성 인권 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수요집회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안돼 1992년 1월 24일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을 만들어 관련 증거 자료를 조사하고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받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초반 한달에 3, 4번씩 비정기적으로 열리던 집회는 1993년 2월 25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1995년 8월 일본 고베 대지진때 집회를 취소했던 것과 올해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추모집회로 대신했던 것을 제외하곤 중단된 적이 없다. 피해 할머니들도 직접 집회 현장에 나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93년에는 빈 세계인권회의 결의문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됐다. 1998년에는 유엔인권소위원회가 일본에 위안부 문제의 조기해결을 권고하는 맥두걸 특별보고관 최종보고서를 환영한다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7년에는 미국의 마이크 혼다 민주당 의원 등 7명이 위안부 피해자 관련 결의안을 공동 제출해 미 하원 본회의에서 채택됐다. 수요집회는 2002년 3월 500차 집회를 기점으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일 주제의 장기 집회’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정대협 측은 피해 할머니와 시민단체, 어린이, 시민 등을 포함해 연간 집회 참여자를 5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답 없는 일본, 뒷짐 진 한국 정부 정대협은 1차 수요집회 때부터 줄곧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의 7가지 사항을 일관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어느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해 배상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위안부에 대한 개인 청구권도 모두 해결돼 안된다는 자세다. 이 때문에 일본의 공식사과와 피해 배상을 받아내는 일은 1000회 이후에도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윤 대표는 “다시 시작되는 1회(1001회) 집회부터는 국제 연대를 더욱 강화해 일본이 변하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일본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한국 정부가 1000회 이후 달라져야 한다는 게 피해 할머니들의 바람이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현재까지 169명이 별세했다. 올해만 14명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는 이제 65명에 불과하다. 정대협 관계자는 “생존해 증언해줄 피해자가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정부가 나서서 공식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헌법재판소가 8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소극적이다. 외교통상부는 헌재 결정 이후‘ 한일청구권 문제 전담팀’을 만들어 일본 외무성에 협정문 해석에 관해 양국 간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공문을 보냈지만 아직까지 공식 응답을 받지 못했다. 윤 대표는 “1000회까지는 정대협 등 민간이 나서서 일본을 압박했다면 이제는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 :: 수요집회 1000회의 역사 ::1992년 1월 8일: 1회 수요집회1992년 1월 17일: 일본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 한국 국회 연설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 관여 시인 및 사과 표시1992년 1월 24일: 우리 정부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 만들어 관련 증거 자료 조사 및 정신대 피해자 신고 시작1993년 2월 25일: 수요집회 일주일에 한 번 개최로 정기화 1993년 6월: 빈 세계인권회의 결의문에 위안부 문제 포함1998년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 맥두걸 특별보고관 최종보고서를 통해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조기해결 권고. 유엔인권소위원회는 보고서 환영 결의문을 만장일치 채택 2002년 3월 13일: 500차 집회.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일 주제의 장기 집회로 세계 기네스북 등재2006년 3월 15일: 700차 수요집회. 세계 8개국 14개 도시 연대집회2007년 6월: 마이크 혼다 미국 민주당 의원 등 7명 위안부 피해자 관련 결의안 공동 제출. 미국 하원 본회의 채택2010년 1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관련 일본 내 법 제정 위한 50만 명 서명 운동 시작2010년 11월: 4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 정부에 전달 2011년 12월 14일: 1000회 수요집회 예정}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정부가 사과하고 보상하지 못한 점에 대해 일본 국민으로서 미안합니다.” 일본 내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 행동 2010’의 책임자이자 시민단체 ‘피스보트’ 공동대표인 노히라 신사쿠(野平晉作·47·사진) 씨는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노히라 씨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 600여 명은 14일 낮 12시부터 1시간 동안 일본 외무성을 포위한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인간 사슬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노히라 씨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본 정부에 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졌을 당시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시민단체인 ‘피스보트’를 결성해 배를 타고 다니며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 배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타서 증언을 했던 1995년부터는 일본 정부에 배상과 사과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이번 시위로 세계 여론이 위안부 문제에 다시 한 번 주목할 수 있도록 해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일본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노히라 씨는 최근 ‘일본 정부의 정당성을 떨어뜨리는 매국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일본 우익단체들의 협박 e메일을 하루에도 수십 통씩 받고 있다. 가족까지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오히려 애국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수요집회가 1000회가 되는 날 일본이 나서서 사과하고 배상한다면 일본 정부의 명예와 정당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명지대는 이번 정시모집에서 나군과 다군으로 나눠 신입생을 모집한다. 나군 선발인원은 일반전형 849명, 농어촌특별전형 122명이며 전문계고교특별전형과 전문계고졸재직자전형에서도 일부를 뽑는다. 다군은 일반전형으로만 559명을 선발한다.나군의 전형요소별 반영비율은 학생부 25%, 수능 75%다. 실기고사를 치르는 문예창작학과는 1단계에서 학생부 50%와 수능 50%로 정원의 6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학생부 25%, 수능 25%, 실기 50%로 최종 합격자를 가린다.또 디자인학부 바둑학과 영화뮤지컬학부(영화전공)는 학생부 25%, 수능 25%, 실기 50%를 반영한다. 체육학부는 학생부 20%, 수능 40%, 실기 40%이며 음악학부(피아노·작곡 전공)는 학생부 20%, 수능 20%, 실기 60%다.다군의 대부분 학과는 수능성적만으로 선발한다. 다만 실기고사를 치르는 음악학부(성악전공)와 영화뮤지컬학부(뮤지컬공연전공)는 수능 40%, 실기 60%로 전형한다.수능 성적은 백분위 성적을 반영한다. 자연과학 공과대학 건축대학(건축학부) 지원자가 수리 가를 선택하면 백분위 점수의 10%를 가산점으로 준다.나군에서는 학생부보다는 수능 성적이 합격의 당락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또 수능을 잘 치른 학생은 수능점수만으로 선발하는 다군이 유리하다. 나군은 학생부 성적을 일부 반영하므로 합격권 수능점수가 다군보다 조금 낮다.원서는 23∼28일에 인터넷으로 접수한다. 제출서류 마감일은 도착일 기준으로 30일이다. 실기고사 일정은 나군이 내년 1월 16∼26일, 다군이 내년 1월 27일∼2월 1일이다.합격자 발표일은 일반학과가 내년 1월 13일, 실기시험이 있는 학과가 내년 2월 3일이다. 02-300-1799, 1800}

‘일본군을 감시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이 파견한 첩보 부대.’ ‘일본 부잣집의 가정부.’초중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무엇인지 써보라’는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1000회 가까이 일본대사관 앞에 나와 위안부의 실상을 알려왔지만 초중학생 대다수는 위안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지난달 25일 서울시내 초중학생(초5∼중2)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인식 조사’ 결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모른다’는 응답이 152명(76%)이나 나왔다. 중학생 100명 중 위안부의 의미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학생은 37명이었다. 초등학생은 더 심각했다. 100명 중 ‘알고 있다’고 답한 학생이 중학생의 3분의 1 수준인 11명에 불과했다. 위안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한 48명 중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집회를 연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은 5명뿐이었다. 위안부를 모른다고 답한 학생 152명을 대상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무엇인지 추측해 적어보라’고 내준 주관식 질문에는 엉뚱한 답변이 쏟아졌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일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일본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사람들’,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기습용 병사를 기르는 곳’ 등 관련 지식이 전혀 없음을 증명하는 답변이 주를 이뤘다. 위안부와 관련한 지식이 빈약한 이유는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린 위안부 관련 내용은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도 많았는데 그중 젊은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는 언급이 전부다. 동북아역사재단 서현주 연구위원(48·여)은 “초등학교 때도 ‘성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 그 폐해도 함께 교육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팔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칠 때 김복동 할머니(87)는 야윈 팔을 겨우 들어 허공에 대고 한 번 힘없이 저었다. “피해를 보상하고 공식 사과하라”는 20년간의 외침과 이에 귀를 닫은 일본 정부에 지친 김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따금 고개 들어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는 가득한 분노를 풀 길 없어 쪼그라진 입술에 힘 한 번 주고 부르르 떨었다.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었던 지난달 23일. 하루 종일 겨울바람이 몰아쳤지만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어김없이 997차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최로 1992년 1월 8일부터 이어져 온 집회는 14일이면 1000회가 된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들이 처음 참가한 7회 집회부터 참석해 피해 할머니 중 집회에 가장 많이 나왔다. 소녀였던 할머니는 과거가 힘겨워 숨어 지내다 68세가 됐고 세상에 나와 아우성을 치다 87세가 됐다. 이날 아흔을 앞둔 노인의 야윈 얼굴에서는 긴 싸움에 지친 듯 감정마저 묻어나지 않았다. 원망과 분노 애원 다시 분노를 넘어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김 할머니는 담담하게 가슴 시린 70여 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14세 소녀의 8년 만의 귀향“어매(엄마), 내 올해로 몇 살이 됐소?” 8년이 지났다 카대. 끌려갈 때 열네 살 묵었었는데 스물두 살이 된 기라. 동무들도 다 시집가고 아무도 없다 카대.내 일본군한테 끌려다니며 모진 고통 당하면서 몇 해가 지났는지도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해방이 됐다고 난리더라꼬. 그래가 내 마지막으로 위안부 생활하던 태국 방콕에서 동기들하고 배 타고 하루 두 끼 죽으로 연명하면서 수개월이 걸리가(걸려서) 고향(경남 양산)에 안 왔나. 도착해 보이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지고 추수를 한다꼬…. 한 10월쯤 됐을라나. 집에 갔는데 어매가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대. 어매도 놀라지. 아가 새카맣게 변했는 기라. 그 세월을 수백, 수천 명한테 당하고 또 당했으니 열네 살 먹었던 아가 온당하다 할 수 있나. 이 아가 어매를 몇 년 만에 봤으면 울고불고 해야 될 낀데 묻는 말이 “내 몇 살이고” 이 말이니 어매는 가슴이 덜컹하지. 와 내 나이도 모른 줄 아나? 일본 군인들 상대할 때 일부러 세월을 잊었는 기라.내 열네 살 때 면에서 사람이 나왔더라꼬.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군복 맹글(만들) 사람이 모자란다꼬. 가서 얼쩡거리니까 “니도 갈래” 그라길래 “내는 바느질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우째(어떻게) 갑니꺼” 캤다. 그 사람이 “가서 배우면 되제. 나이 쪼매 더 먹어서 시집갈 때 되면 언제든지 보내줄 테니 걱정 말그라” 카더라. “우리 어매랑 가면 몰라도 안 갈랍니더” 카니 “일본 정부에서 하는 일인데 안 간다 카면 너거 가족 다 못살게 만들 끼다” 카는데 내 어찌나 겁이 나던지 그 길로 따라갔제.그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으로 끌려다니면서 모진 일 많이 당했제. 처음에는 이래(이렇게) 고통당해도 나이 쪼매 차면 보내준다 약속했으니 곧 고향 간다는 희망이 있었제. 그래 날짜 헤아려 가매 겨우 견뎠는데 끌려댕기는 나라만 바뀌고 안 보내주더라꼬. 내 어데 말이 통하나. “좀 보내주소. 콱 죽을 거 같소” 말해도 일본 놈들은 못 알아듣고 웃기만 허네.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주니 벙어리 신세가 된 기제. 어린 내를 그리 농락했으면 ‘미안하다, 인자(이제) 집에 가그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그라더라. 그래 2년이 갔다. 그라고 나서는 날짜를 안 헤아리고 살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 아는 것도 포기하고 잊어버렸다. 세월 따지고 살았으면 너무 고통시러워서 속이 터졌을 끼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세월을 우찌 헤아리고 살겠노.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아나간 기라. 아침에 날 새면 오늘도 무사히 눈떴구나, 해가 지면 무사히 살았다, 밤에 잠들면 자는 새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겠노. 그렇게 잠들고 나면 또 눈이 떠지더라. 그 고초라는 기(게) 입에 다 담을 수 있나. 처음에는 생각도 몬(못)했다. 그래 오래 걸릴 끼라고는.○ 희망을 걸었다수요집회가 1000회가 된다 카대. 내는 여든하고도 일곱이나 안 묵었나. 함께 시위하던 동무들은 다 죽고 겨우 육십 몇 명 남았제. 내 집회 처음 할 때가 예순여덟 아이가. 그때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을 수도 있고 할매라도 젊은 할매였다. 할매들 그때는 “싸우자, 싸우자” 카면서 힘도 넘쳤다꼬. 서울서는 그해 1월부터 위안부 피해 할매들 도와준다고 여성 단체 회원들 모여 가지고 그 추운데 일주일마다 집회를 한다 카는데 내 우째 가만히 있겠노. 그 길로 새벽에 내 하는 식당 있는 부산서 기차를 탔다 아이가. 그해 봄쯤 됐을 끼다. 벌써 집회를 7번인가 했다는데 새벽에 집에서 ‘몸뻬 바지’ 딱 꺼내 입고 운동화 끈 단단하게 묶고 나오는데 ‘그래 한번 해보자. 할매가 가는데 그놈들도 가만히 있겠나’ 싶었제.마음 단단하게 묵고 일본대사관 앞에 갔는데 눈물이 ‘확’ 하고 안 터지겠나. 몸이 막 떨리더라꼬. 고래고래 고함만 질렀다. 조목조목 항의를 해야 되는데 악밖에 안 나오더라꼬. 내는 위안부 갔다 온 죄로 40년을 타향서 ‘양산집’ 식당 하나 하면서 숨어 살았다. 하늘 아래 “어매”라 부르는 자식 하나 없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살 수 없게 맹글어 놓고… 족두리 한 번 못 써보게 맹글어 놓고…. 낼로(나를) 좀 보라꼬, 다 늙어서 온 할매 한 번 보라꼬 소리만 질렀다. 다른 도리가 있나. 그라면 이놈들이 나와서 “할매 이제 왔는교. 미안하오” 할 줄 알았다.그렇게 믿고 갔는데 경찰들이 오더니 할매들을 버스에 강제로 태우지 않겠나. 할매들이 울고불고 해쌌는데도 달랑 들어가지고 시청 광장에 내려놓데. 뭐 어떻겠노. 우리는 또 오면 된다 아이가. 기차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제. 기차 안에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함 해보자. 계속 나가서 소리치면 ‘미안하게 됐소’ 이 한마디 안 하겠나” 싶더라꼬. 희망이라는 게 있었제. 돈이 탐이 나서 그라는 게 아이다. 인간의 도리로서 잘못한 거 같으면 사죄를 해야 될 거 아이가.집회 때마다 계속 올라왔다. 한 50번째 됐을 때는 아예 청와대로 갔다. 문 앞에서 드러누워 버렸다. “대통령님요. 해결 좀 해주소. 좀 나와 보소”하고. 또 경찰한테 잽히(잡혀)가지고 시청 광장으로 쫓겨났지. 처음에는 이래 하면 갑자기 해결될 거 같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과 하고, 보상 하라”고 고함만 안 질렀나. 소리 지르고 잽히 가고 시청광장에 풀어지고 또 내려가고… 그라다 보이 세월이 흐르데.○ 90세 앞두고 꺾인 희망몇 번은 집회할 때마다 몇 회짼지 써놓고 헤아렸다. 100번 했으니 우리 말 좀 들어주겠네 하고. 안 들어주더라. 일본대사관에 창문이 이십 몇 개 있거든. 우리가 가면 커튼 다 내리가지고 창문 다 막아뿐다. 내다보지도 않는다. “배상하라. 사죄하라” 목이 터지게 아우성을 쳐도 문 앞에 도둑 잡는 카메라 갖다놓고 숨어가지고 “저 할매들이 오늘은 또 뭐 하는가” 보고만 있다. 내도 인자 나이가 들고 속이 갑갑해서 벙어리처럼 소리도 못 지르고 오늘은 커튼이라도 쪼매 열어놨나 싶어서 대사관 한 번 쳐다보다가 속 썩고 만다. 인자 세월이 마이 지나서 혼자 서 있기도 힘들게 됐는데도 아무도 할매 말을 안 들어주는 기라. 애원하고 항의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기라.그때부터 200회 300회 이래 안 헤아맀다. 그라면 속이 썩어서 살 수가 없다. 인자는 일주일 지나 눈 뜨면 아 수요일이네. 집회 마치고 집에 오면 수요일이 무사히 갔구나 하면서 한 주, 한 주 버틴다 아이가.내 8년을 끌려 다니면서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열여섯 살 때부터 술을 마셨다. 외국을 댕기다 보니 위스키하고 고량주 마시가면서 일본 놈들 상대했다. 맨정신으로 버틸 도리가 있나. 일본군 상대하고 나면 담배도 피웠다. 어린 가심(가슴)에 피맺힌 한을 풀 방법이 있었겠나. 지금도 집회 마치고 오면 내 방에 앉아 줄담배를 피운다. 할매가 아무리 말을 해도 커튼 한 번 안 걷는 게 너무 답답해서 수요일마다 담배를 억수로 마이(많이) 피운다. 내 오고 스물두 살 먹은 처녀가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어매가 “결혼을 해야 안 되겠나” 하더라. 어매는 옷 맹그는 공장 갔다 왔는 줄로만 알더라꼬. 안되겠다 싶어 어매 곁에 가서 얘기를 했지. 그랬더니 어매가 “저승 가서 조상을 어떻게 만나겠노. 자식 이래 만든 죄로 뭐라 말하꼬” 만날 그라드만 내 오고 6년 만에 안 돌아가셨나. 의사가 그라더라꼬. “너거 어매 심장에 화가 가득 들었다”꼬.1000회가 됐다고 다들 난리구마. 내는 1000회가 되도록 해결이 안 나고 있으니 답답해. 내는 백내장 수술이 잘못돼서 왼쪽 눈은 안 보이고 오른쪽 눈도 사람이 찌그러져 보인다. 눈 쪼매라도 보일 때 대사관 놈들이라도 빼꼼히 내다보고 “할매, 이제 고마 화 푸소. 미안했소” 하는 거 볼 수 있겠나. 처음에는 생각도 몬했다. 이래 오래 걸릴 끼라고는. 끌려다니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사과도 못 듣던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심이 답답하네. 우리 어매도 이래 답답했겠는가. 이래 화가 많았겠는가.갑자기 어매가 보고 싶소. 1000회를 넘기면 안 될 낀데 말이오. 더 기다려야 되면 안 될 낀데 말이오. 그리 되면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인자 안 될 낀데 말이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회사원 양모 씨(23·호텔 직원)는 최근 2개월 동안 거의 매일 새 옷을 입고 회사에 출근했다. 구두도 자주 새것으로 바뀌었다. 주변 사람들은 부쩍 옷을 많이 사는 양 씨의 과소비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옷을 장만하는 ‘비결’이 있었다. 남성복 전문 인터넷 쇼핑몰에 회원으로 가입한 양 씨는 가입 시 사이트를 추천해 준 기존 회원의 ID를 입력하면 해당 회원에게 적립금 500원을 선물로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지인 명의를 도용해 회원 가입을 한 다음 ‘사이트 추천 회원’에 자신의 ID를 넣었다. 곧 500원이 생겼다. 이후 양 씨는 적립금을 쌓기 위해 동생과 함께 지인 5명의 명의를 빌렸다. 이들은 가입한 뒤 바로 탈퇴해 ID 이니셜을 살짝 바꿔 재가입하는 방식으로 5700개의 ID를 만들어 적립금을 쌓았다. 이렇게 형제가 3개월간 모은 적립금은 500만 원. 이들은 이 돈으로 무려 120개의 옷과 시계, 구두를 샀다.서울 혜화경찰서는 이 ‘의좋은 형제’를 컴퓨터 등 사용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7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 집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옷, 구두가 가득했다”며 “다른 사이트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적립금을 쌓아 물품을 모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서울 수서경찰서는 고급 주택에 침입해 시가 수십억 원에 이르는 국보급 도자기를 훔친 혐의 등으로 장모 씨(57)와 공범 2명을 구속한 뒤 검찰에 송치했다고 6일 밝혔다. 조사 결과 주범 장 씨는 9년 전 현대그룹 대북송금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영완 씨(58) 집에서 100억 원대 금품을 강탈한 혐의로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경찰에 따르면 장 씨 일당은 3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사업가 집에 침입해 피해자 이모 씨(46·여)를 결박한 뒤 금고에 보관돼 있던 도자기(사진)와 1억 원 상당의 금괴 및 현금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강도 등)를 받고 있다. 이들은 범행 후 도자기를 처분하기 위해 고미술상을 찾았다가 “국보급 도자기다. 30억 원은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매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도자기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장 씨는 또 다른 공범과 함께 종로구 청운동에서 주택가를 털다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경찰은 이 씨가 도난당한 도자기의 감정을 의뢰한 결과 해당 도자기가 ‘백자청화매죽문호(白磁靑畵梅竹文壺)’라고 불리는 조선 후기 백자로 문화재급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조사 결과 이 씨는 도자기를 도둑맞고도 경찰 조사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피의자를 처벌하려면 진술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자 이 씨는 마지못해 남편 회사 직원을 대리인으로 보내 진술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공범 중 한 명이 “장 씨가 2002년 3월경 김 씨의 단독주택(종로구 평창동)에 들어가 수백억 원 상당의 금품을 털었다고 자랑하며 범행을 함께 하자고 꼬드겼다”고 진술해 범죄 기록을 조회했다. 이 과정에서 장 씨가 김 씨 집 강도 사건으로 실형을 살다 나온 기록을 발견했다. 김 씨는 2003년 현대그룹에서 양도성예금증서(CD) 150억 원 상당을 건네받아 돈세탁한 뒤 정치권에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200억 원을 제공한 혐의와 현대상선 비자금 300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 계좌로 송금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 등으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았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고깃집 주인 김모 씨(48)는 출근길 가게 문을 열자마자 뒷걸음질 쳤다. 전날 가게 내부를 깨끗이 치우고 퇴근한 기억이 분명했지만 먹다 남은 삼겹살과 김치, 젓가락, 맥주병이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돈 3만 원도 사라진 상태였다. 분식집 주인 A 씨도 가게 문을 열었다가 누군가 라면을 끓여 먹고 국물만 남긴 냄비를 발견했다. 부엌 찬장에 있던 라면 서너 개와 돈 5만 원도 함께 사라졌다. 8월부터 지난달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이런 일을 당한 식당은 12곳이나 됐다. 피해 식당 주방에 있던 환풍기는 모두 뜯겨 있었다. 범인은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8월 출소한 김모 씨(31)였다. 고아인 그는 출소한 뒤 찜질방을 전전하며 밥 먹을 돈도 없이 생활하다 자신만의 생존법을 찾았다. 새벽에 환풍기를 뜯고 식당에 들어가 주린 배도 채우고 찜질방비도 마련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지난달 29일 이런 수법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돌아오는 김 씨를 붙잡아 구속했다고 2일 밝혔다. 김 씨는 상습 절도로 20세 이후 8년 가까이를 교도소에서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출소 이후 넉 달 동안 밥 먹을 돈도, 잘 곳도 없어 너무 힘들었다”며 “다시 교도소에 가게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