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나무 펜스 사이로 담쟁이 한 줄기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촘촘한 틈을 뚫고, 생명은 길을 찾아 나아갑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젯밤 프로야구 LG 트윈스가 한화 이글스를 꺾고 202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이 응원하는 팀이 우승을 차지했나요? 1982년 3월 창설된 한국 프로야구는 이제 온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이자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100년 전 한반도에서 펼쳐진 야구 경기를 기록한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미국팀을 상대로 일본팀과 조선팀이 각각 경기를 했었었네요. 조선팀은 경기를 앞두고 야구 좀 하는 사람들을 급히 모아 팀을 꾸렸다는 재밌는 표현도 있었습니다. 미국 시카고대학팀(C)과 서울연합팀(S)의 경기 결과를 보여주는 스코어보드판 사진도 있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두 명의 신사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1925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7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경기 사진을 하나 보겠습니다. 다른 경기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1925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사진설명은 “ 미국 시카고대학과 일본 보즈카 야구전 - 어제 경성운동장”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2루 도루를 하던 선수가 아웃되고 있습니다. 질주를 했던 흔적이 흙먼지가 보여줍니다. 뒤편에 있는 심판이 아웃을 손짓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사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순간포착’이 놀랍습니다. 기자가 선수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원근의 묘사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선수들 바로 옆에서 찍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홈플레이트 뒤나 덕아웃쪽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합니다만 그 때는 망원렌즈가 없는 대신 선수들 바로 옆에서 카메라맨이 있었었네요. 경기를 어떻게 진행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날 경기는 2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미국팀과 일본팀과 경기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팀득점안타 실책 볼넷삼진시카고대(미국)97343보즈카(일본)64674당시 야구 경기를 신문은 어떤 방식으로 보도했는지 궁금하실텐데요,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던 당시 기사(1925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7면)를 지금의 언어로 변환시켜 보았습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 야구팀과 서울연합팀의 경기입니다. ■ 市軍의 맹타(猛打)와 철통 같은 수비(守備)결국 11대 2로 전(全)경성(京城) 패배산해(山海)의 관중이 운집한 성황 속에 끝난조선체육회 주최, 본사 후원 국제적 야구전(野球戰)멀리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천리길을 달려 조선 경성에까지 원정 온 미국 시카고(市俄古)대학 야구단이 조선인 대표팀 전경성과 맞붙었다.이번 국제 대야구전은 조선체육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지난 28일 오후, 훈련원 경성운동장에서 성대히 열렸다.서울에서 국제 경기가 열린 것은 약 3년 전 미국 직업야구단과의 시합 이후 두 번째였다.더욱이 이번에 온 시카고대학 팀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이라, 대중의 관심은 대단하였다.경기 시작 한참 전부터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오후 두 시쯤에는 운동장 안팎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금풍(金風)이 산뜻이 부는 가을 하늘 아래, 체육회기와 본사기가 교차하며 펄럭였고, 청명한 석양빛이 경기장에 비쳐 운동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날씨였다.오후 한 시경, 우리 전경성군이 감색(紺色) 유니폼을 입고 서상국(徐相國) 주장의 인솔 아래 자동차를 타고 도착하자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뒤이어 시카고군도 일본 와세다대 야구부원 석정(石井)의 안내를 받아 입장하여 맹렬히 연습을 시작했다.■ 경기 개요오후 3시 15분, 구심 석정 씨의 “플레이!” 구호가 울리고, 이어 이상재 씨의 시구식이 있었다.3시 17분,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전경성군(全京城軍)의 선공(先攻)으로 대야구전의 막이 올랐다.우리 선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6회 초, 이영민(李榮敏)의 2루타를 시작으로 시카고군의 철벽 수비를 뚫고 귀중한 2점을 올렸다.이때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함성과 눈물이 교차했다.비록 최종 스코어는 11대 2로 전경성의 패배였으나, 기백과 투지에서는 오히려 승리했다고 할 만했다.멀리 미국에서 온 스포츠맨들도 우리 선수들의 용감한 플레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합 경과 요약1회: 시카고군이 먼저 3점을 득점.2회: 시카고군 추가 3점.3회: 다시 2점을 더하며 점수 차를 벌림.6회: 전경성군 이영민의 2루타와 마춘식(馬春植)의 안타로 2점 만회.7회 이후: 시카고군이 다시 3점을 추가.최종 결과: 시카고대 11 - 전(全)경성 2■ 경기 후 소감 (운동기자 논평)시카고대 야구단은 미국 대학 중에서도 일류 강팀이며, 전경성군은 조선 야구계의 정예를 급히 모은 팀이었다.강적과의 대전이라 결과는 예측된 바였으나, 관중의 관심은 “과연 몇 점 차로 질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전경성군은 급조된 팀이라 호흡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수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주장 서상국은 와세다 선수 시절 이후 이런 대경기에 처음 나섰으나, 노련미는 다소 부족해도 투지는 넘쳤다.타격에서는 초반 5회까지 뚜렷한 진출이 없었으나, 6회 초 2점을 뽑은 장면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투수 김수영(金壽永)은 변화구를 섞어 비교적 좋은 성적을 보였다.비록 강타를 막진 못했으나, 일본인 전경성군보다 나은 성적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비록 9점 차의 패배였으나, 정정당당히 싸운 패전이라 할 만했다.수비력은 시카고군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이날 경기장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소개합니다. 신문의 2개 면에 큰 크기의 기사와 사진을 배치할 만큼 당시 큰 관심을 모았던 모양입니다.사진을 좀 키워보겠습니다. 투수의 공이 날아오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포수와 심판 그리고 타석에 선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아래 사진은 구름 관중이라고 할 만큼 많은 시민들이 신기한 듯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입니다. 양팀 주장이 경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는 모습도 작은 사진으로 들어가 있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야구 사진이 처음 소개되었을 당시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특히 100년 전 스코어보드판 사진에 대해 아시는 내용이 있으시면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상식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여러분이 응원하는 팀이 꼭 한국시리즈를 우승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달팽이 장식품 위로 비행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속도는 달라도, 저마다의 길 위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겠지요. ―인천 서구 드림파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신문사 야간 근무조에 배정되면 크게 두 종류의 밤이 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밤과, 입에 단내까지 나는 밤이다. 어제는 후자에 속했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거물들의 회동이 있다는 뉴스에 사다리와 카메라를 챙겨 강남으로 향했다. 이번 회동의 핵심 인물은 엔비디아(NVIDIA) 최고경영자 젠슨 황이었다. 그가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과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과 서울 삼성동의 치킨집 ‘깐부치킨’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보도가 떴다. 황은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고, 곧바로 서울 삼성동으로 향했다. 7시쯤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고 4시 조금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더니 이미 200여 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치킨집 앞 인도는 기자들로 가득했고, 심지어 도로 건너편 인도까지 취재진이 옮겨가 치킨집 내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시간쯤 할 일이 없었고, 분위기는 긴장감과 들뜬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 가이드라인 제시와 풀단 구성 오후 6시 반경, 엔비디아 측 홍보담당자들과 한국 기업 홍보팀 직원들이 기자들과 조율을 위해 나왔다. 주로 엔비디아 측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한국 기업 홍보팀이 기자들과 구체적인 풀단(full-team) 구성을 논의했다. 방송 영상용 카메라맨 1명, 신문사진기자 2명, 취재기자 5명으로 풀단을 구성하라는 주문이 있었고, 많은 기자들이 그 가이드라인을 받아들였다. 기자단 사이에 잠깐 안도감이 흐른 순간이었다. “아, 이번엔 홍보팀이 확실히 정리를 잘 했구나” 하고 말이다. ● 돌발 변수의 등장 그러나 그때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풀 취재 필요없이 치킨집 창가 쪽 문을 열어 많은 기자들이 밖에서 세 명의 CEO 회동을 찍을 수 있게 하겠다던 새로운 안이 제시되었고 기자들로서는 더 좋은 제안이었다. 그런데 황이 도착하기 5분 쯤 전, 엔비디아 측 경호팀이 “문을 열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내부 경호 쪽에서 창가-문 동선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처음 정해졌던 풀단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런데 엔비디아 경호팀이 한국 기자들을 외국 기자와 구별하지 못하면서 풀단조차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마침 뒤편에서 VIP출현을 암시하는 환호성이 터졌고, 경찰이 뒤늦게 인파를 정리하려 호각을 불면서 현장은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 셔터 찬스 폭발 오후 7시 20분경, 드디어 젠슨 황이 등장했다. 치킨집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던 인파 사이에서 환호가 터졌고 스마트폰과 카메라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들렸다. 황은 단순히 등장만 한 것이 아니라 인파 속을 걸으며 끊임없이 시민들과 악수하고 손을 흔들었다. 사진기자 입장에서는 셔터 찬스가 넘쳤지만, 동선이 길고 인파가 몰려 취재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 예상치 못한 셔터 찬스 풍년 오후 7시 25분경, 세 회장이 자리를 잡고 본격 회동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돌발이 있었다. 황이 반팔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고, 시민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모습이 연출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김밥이었다. 기자와 시민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외부로 집중됐다. 그가 치킨집 안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치킨 조각을 들고 다시 나왔다. 취재진은 3인 회동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야말로 폭풍처럼 기록할 분량이 주어진 셈이었다. ● 마무리 포즈와 메시지 오후 8시 30분경, 세 회장은 치킨집 테라스로 나와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했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었지만, 그 장면이 내보낸 메시지는 비상했다. ‘반도체 파트너십 강화’다. 한마디로 ‘깐부’의 탄생이라고 말할 만한 장면이었다. 치킨집 사장님도 이날의 히어로 중 하나였다. 세 명의 회장이 내민 커다란 치킨 사진 옆에 연달아 사인을 남기고, 매상이 올라간 것은 물론 현장 사진에도 담겼다. ● 코엑스까지 걷겠다고? 우려 속 동선 회동을 마친 세 회장은 처음에는 다음 일정으로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GeForce Gamer Festival)을 위해 코엑스로 걸어가겠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한국 상황을 잘 모른 무모한 플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동선이 변경되어, 들어왔던 길의 반대편에 주차된 검은색 밴을 타고 다음 행사장으로 떠났다. 오후 8시 40분이었다. ● 폭풍 같았던 등장과 퇴장 소맥 러브샷을 나누고, 시민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인파 속을 걸어든 AI 칩업계의 거물의 모습에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한 황CEO는 생각보다 많은 방송/사진 분량을 확보했다. 어쩌면 세상을 상대로 자신의 비즈니스를 알려야 하는 그와 참모들에게는 이런 퍼포먼스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분명 고단수였다. 취재 현장에서는 ‘계획된 사진 연출’과 ‘돌발 메이킹 포인트’가 혼재했다. 홍보팀이 사전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음에도 경호 및 현장 변수 하나가 계획을 뒤엎었다. 그 반대로, 예상치 못한 순간이 오히려 더 강렬한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냈다. 사진기자 입장에서는 이 변화 자체가 기회였고, 아마 보는 시청자와 독자들도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시총 만큼 강렬했던 젠슨 황의 행보였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0일 서울 용산구 스타벅스 아카데미 센터에서 모델들이 겨울 프로모션 음료와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스타벅스 코리아는 퍼즐 그림책 시리즈 ‘월리를 찾아라’와 협업해 ‘월리 체리 푸딩 크림 프라푸치노’ 등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선보인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0일 인천 서구 드림파크 야생화 단지에 마련된 조형물이 국화에 둘러싸여 있다. 23일부터 이곳에서 열린 ‘2025 드림파크 국화축제’에서는 국화 토피어리와 미니정원, 포토존 등 다양한 전시가 마련돼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국화축제는 11월 5일까지 열린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제43회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서 한 참가자가 바닥에 엎드린 채 산문을 쓰고 있다. 강원 강릉시에서 왔다는 이 참가자는 “꼭 내 글을 내고 싶었다”며 마지막으로 산문을 제출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가을에 쓰는 편지 물들어가는 나무 사이로 작은 우편함이 무언가를 기다리듯 서 있습니다. 이 가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한 장 넣어볼까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찬 바람 부는 해안가에 앉은, 이름 없는 얼굴들 남루한 옷차림의 남녀노소가 목포경찰서 앞 해안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허리춤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맨발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손을 모아 기도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 앞에는 높은 경찰서 담장과 총을 든 경찰들이 서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소작료를 내지 못한다고 항의하다 경찰에 잡혀 간 마을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온 농민들과 가족들입니다. 연좌시위를 마친 후 사람들은 한 단체가 제공한 실내로 들어와 쉬다 신문기자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두건을 두른 여성들이 맨 앞줄에 먼저 앉았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설명에는 그저 “도초도 소작인 노략(老弱)”이라 표기돼 있었을 뿐입니다. 늙고 약한 소작농들은 구호를 외치지도 않고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절망과 분노가 함께 겹쳐 있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도초도 소작쟁의’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25일자에 실린 사진과 함께, 10월 11일, 14일, 19일, 22일, 25일 및 1926년 4월 24일, 26일 그리고 5월 6일자에 관련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 흉년으로 소작료를 낼 수 없던 농민들전남 신안군 도초면은 바람이 많은 섬이었습니다. ‘도초(都草)’라는 이름은 풀이 많아 붙여졌다고 하지만, 그해 가을 그 섬에는 풀보다 절망이 더 크게자랐습니다. 1925년은 흉년이 겹친 해였습니다. 전국을 강타한 홍수는 섬마을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2025년 10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당시 대홍수를 기록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홍수의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일본인 지주가 거둬가는 소작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올해만이라도 줄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습니다.“법은 법이다. 내지 않으면 압류다.”며칠 뒤,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의 집달리와 경찰이 ‘불납 소작료’에 대한 차압을 집행하러 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농민들은 손에 괭이와 돌멩이를 쥐고 그들을 막아섰습니다.경부가 집행의 이유와 집달리의 권위를 설명하자, 농민들은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그까짓 소리는 벌써 다 알고 있는 것이니 재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군중의 기세에 눌린 경부는 설명을 중지했고, 집달리들은 강행을 시도하려 했으나 천여 명 군중의 위협에 쫓겨 다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일부 농민들은 “우린 빚쟁이가 아니오. 밥을 짓는 사람이오.” “죽기는 매한가지니 죽여 달라”며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결국 집달리와 경관 일행은 차압을 실행하기는커녕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고 신변의 위태로움을 느끼며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농민들은 단순한 저항이 아닌, 조직된 힘으로 법의 강제력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경찰은 물러갔지만, 도초도의 바람은 그날부터 불안하게 요동쳤습니다.● 섬마을에 들이닥친 경찰10월 10일 밤, 목포에서 무장 경찰 120명이 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총을 메고, 곤봉을 들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지도부라 불리던 소작회 간부 20여 명을 묶어 끌고 갔습니다. 새벽녘, 섬의 언덕 아래에 남은 1천여 명의 농민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 손에는 삽과 괭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벼를 우리 손으로 지키자.”잠시 후 군홧발과 맨발이 뒤엉켰고, 비명과 울음이 바다를 뒤덮었습니다. 그날의 싸움은 길게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신문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경찰과 1천여 군중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났다.”● 냉정한 법며칠 뒤, 목포 경찰서 앞 해안에는 도초도에서 끌려온 이들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녀노소 200여 명이 찬 바람 부는 밤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 땀과 먼지에 젖은 농부들, 그들은 침묵으로 호소했습니다. 그 장면을 본 기자는 기사 말미에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찬 바람 부는 해안에서 헤진 홑옷으로 지내고 있다. 법률이 있다 하나, 그들은 어디에 호소할꼬.” 1926년 4월, 도초도의 소작농 13명이 광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은 ‘공무집행방해’와 ‘소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고 중에는 소작회 간부 김용택, 김상희, 문상현, 박창진 등이 있었습니다. 4월 19일 첫 공판은 내산(內山) 재판장과 횡전(橫田) 검사 앞에서 열렸습니다. 법정은 농민들과 방청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재판부는 사건을 두 가지 혐의로 나누어 심리한다고 밝혔습니다.“공무방해”와 “소요”. 국가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이었습니다. 피고들의 증인 신청은 전부 기각되었습니다. 검사는 단호하게 구형했습니다. “김용택·김상희 각 징역 10개월, 문상현·김병섭·박창진 각 징역 8개월, 박정수·김종보 각 6개월.” 소요죄로는 고경일에게 8개월,고만희·최동민·강경용·김종언·고형빈에게 6개월이 구형되었습니다. ● 판결과 귀향1926년 5월 3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 재판장 내산은 냉정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었습니다.피고 15명 중 4명에게 실형, 8명에게 집행유예, 3명에게 벌금형이 선고되었습니다. ▲ 김용택 징역 10개월 ▲ 김상희 징역 8개월 ▲ 문상현·박창진 징역 7개월 ▲ 김병섭·박정수·김종보·고만희·최동민·강경용·김종언·고형빈 각 6개월(집행유예 2년) ▲ 고경일·김형준·박난기 벌금 30원그들은 9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판결 후,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은 농민 11명은 곧 석방되었습니다. 신문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석양 무렵 마을 사람들의 환영 속에 출감하여 곧바로 도초도로 향하였다.”그들의 손에는 짐보다 상처가 많았고, 그들의 눈에는 해방보다 허무가 비쳤습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다시 흙을 밟았습니다. 그들이 떠나왔던,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했던 땅으로.● 지금의 도초도는 ‘수국의 섬’지금의 도초도는 평화롭습니다. 과거 소작농민들이 발자국을 남겼던 밭과 논 위로 지금은 관광객들이 걷는 꽃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수령 1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즐비하고, 12km에 달하는 ‘도초 수국길’에서는 매년 6월 수국 축제가 열립니다. 100년 전 도초도 연좌농성 사진은 흐릿합니다. 바랜 인화지 위의 인물들은 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기사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을 정리하면서 일본의 양심과 젊은 세대에게 이 사진에 깃들어 있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반도의 끝자락 섬마을까지 남겨져 있는 역사의 상처 같은 것 말입니다. 때마침 일본의 총리가 선출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역사의 오독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존을 위해 법과 싸웠던 농민들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시길 좋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콘크리트 틈에서 붉은 맨드라미가 피어났습니다. 씨를 뿌린 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꿈을 틔운 걸까요.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3일 서울 용산구 노들갤러리에서 열린 2025 국가무형유산 이수자 기획전시 ‘결, 시간의 흐름 속에서’를 찾은 시민들이 전통 공예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전통 공예 장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무형유산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30일까지 열린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제4회 ‘K-ESG 경영대상’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택시가 국토교통부 장관상, 한국에너지공단이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상, 한화자산운용·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이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받는 등 총 41개 기업·기관·단체가 부문별 대상을 수상했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이 행사는 산업통상부 등 주요 부처가 후원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민들레꽃에 벌과 나비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꽃은 꿀과 꽃가루를 내주고, 벌과 나비는 번식을 돕습니다. 자연의 공생이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인천 소래습지공원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세찬 빗속 펼쳐진 북한의 열병식지난 10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이 열렸습니다. 인공기와 꽃을 든 수십만 명의 군중 앞을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20형’이 지나갔습니다.행진하는 군인들과 트럭뿐 아니라 관중들 역시 질서정연하게 서서 박수를 치고, 카메라가 움직이면 그에 맞춰 발을 굴렀습니다. 세찬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 조명이 켜진 광장은 더욱 비장하고 엄숙하게 보였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같은 시대, 같은 문화의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북한의 ‘사진 문화’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현장은 촬영용 로봇과 드론, 그리고 수십 명의 카메라맨이 포진한 가운데 촬영되었고, 곧바로 17분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재편집되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영상에는 현장음과 웅장한 배경음악이 덧입혀졌습니다. 필자도 생중계 대신 그렇게 편집된 영상을 보았습니다.연단 위 김정은과 중국·러시아 대표단, 연단 아래 환호하는 주민과 군인들, 그리고 대형 무기들이 교차 편집된 화면은 철저히 연출된 뮤직비디오에 가까웠습니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북한 내부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이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해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지난달 중국의 열병식이 ‘절제의 미학’을 강조했다면, 북한의 열병식은 ‘감정의 연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밤이라는 시간적 조건과 격정적인 나레이션이 그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습니다.그렇게 열정의 밤이 끝난 다음날, 김정은은 참가자들을 위한 일종의 ‘위문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12일 대형 실내 체육관에 경축행사 참가자들과 진행 요원들을 모아 대집단체조와 공연을 보게 했습니다. 검은 가죽 점퍼 차림으로 등장한 김정은은 준비된 A4 용지를 펼쳐 들고 “우리 국가의 응력과 저력, 위력이 아쉬운 점 하나 없이 훌륭히 과시됐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습니다.● 행사의 또 다른 주인공인 북한 주민들화면을 보며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문 곳은 인민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며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여주는 주민들의 표정이었습니다. 김정은 역시 연설에서 “가을비에 찬바람까지 싸늘한 날씨였다”면서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모두가 너무도 훌륭히 자기 몫을 수행했다”고 언급했습니다.비를 피할 우비도, 우산도 없이 서서 환호하는 사람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발로 땅을 굴러 만들어낸 소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북한식 현장음’이 되었습니다.평양 시민들이 대부분 동원된다고 볼 때, 이런 국가 행사는 일종의 ‘특별한 무대 경험’이기도 합니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으로 참여하는 ‘배우’로서의 인민들—실제 열병식 영상 곳곳에는 클로즈업된 주민들의 얼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북한 열병식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북한 주민들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셀카는 언제 가능할까?그렇다면 이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위문공연 하나로 충분히 보상을 받는다고 느낄까요? 사진 한 장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북한은 과거 최고지도자가 참석한 행사가 끝나면 참가자들을 그룹별로 나누어 ‘1호 사진’을 촬영해 선물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물질적 보상이 부족한 사회에서 ‘사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하지만 최근 김정은 시대 들어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참가자 수가 수만 명에 이르면서 이런 단체사진 촬영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참여를 기록으로 남길까요.이번 열병식과 위문공연에서도 셀카를 찍는 주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식 카메라가 철수한 뒤 일부가 기념 촬영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행사 도중 스마트폰을 꺼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됩니다. 하나는 행사장 입장 전 스마트폰을 일괄 제출했다가 종료 후 돌려받는 방식일 가능성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카메라에 비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민 스스로 행사가 국가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개인적인 기록보다는 집단의 일원으로 남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물론 북한 신문에는 스마트폰을 든 주민들의 모습이 가끔 등장합니다. 백두산 불꽃놀이, 유원지 등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지도자가 등장하는 공식 행사에서는 스마트폰을 드는 이가 없습니다. 지난 10월 13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김일성·김정일 기금총회 2025’ 친선모임 사진에서는, 평양 태권도 전당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남성들과 응원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그들은 북한 주민이 아닌 외국인 방문객이었습니다.이번 열병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든 이들은 대부분 외신 기자들이었습니다.● 셀카가 사회의 개방성을 보여준다서울 광화문 청계천에는 가을이 내려앉았습니다. 다리 아래로 노란 불빛이 흐르고, 벤치마다 연인들이 웃으며 셀카를 찍습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나누는 웃음이 카메라 속에 담깁니다.2018년 6월,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싱가포르 시내를 잠시 순회했습니다. 그때 싱가포르 외교장관 비비안 발락리쉬난이 김정은과 함께 셀카를 찍어 트위터에 올리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진 속 김정은은 스마트폰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셀카는 이제 현대인의 본능입니다. 누구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합니다. 북한 주민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그들이 국가 행사에서 스스로 셀카를 찍을 수 있을 때, 그때가 북한 사회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 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이번 주 백년사진은, 100년 전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사진’이라는 도구가 분단을 거치며 남과 북에서 얼마나 다르게 자라왔는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도 댓글로 함께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버려진 노란 소국 한 다발, 누군가 다시 품어주길 바라는 듯 쓰레기통 위에 놓여 있네요. ‘희망’이란 꽃말을 지닌 꽃, 따뜻한 주인과 함께하기를. ―서울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추석 연휴, ‘광복 80주년 특집쇼’라는 이름의 무대에 온 세대가 함께 들썩였습니다. 고척돔의 함성, TV 앞의 떨림까지 더해지며 50년 넘게 축적된 한 가수의 시간은 또 한 번 현재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그의 노래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60대의 장노년층의 남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는 흔치 않은 모습들이었습니다. 그의 노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동아일보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던 조용필의 장면들을 꺼내, 그의 반세기 궤적을 더듬습니다. 아카이비스트들과 기자들이 지난 50여 년간 엄선해 놓은 이미지들입니다. 가사와 리듬으로 우리의 인생을 함께 걸어온 가왕의 또 다른 흔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 세상에 첫 등장 ─ 1972년, TV ‘영 사운드’밤 7시, 즉흥 놀이를 곁들인 젊은이 프로그램에 무명 신예가 서 있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는 급변했고, TV는 시대의 신경망이었습니다. 아카이브 속 흑백 사진에서 그는 아직 ‘가왕’이 아니라, 무대의 질감을 배우는 연주자이자 보컬입니다. 이 첫 진입의 사진은 훗날 팔색조 창법으로 확장될 원형을 암시합니다.● 금지와 비상 ─ 1977~1980년, 침잠과 컴백대마초 파동으로 멈춘 인기(1977)의 기사 사진은, 굳은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여줍니다. 그 멈춤은 곧 수련이었습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의 컴백.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무대 사진 속 그는 한 옥타브 위에서 다시 내려와 관객의 심장에 닿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도시 변방의 그리움을 불렀다면, ‘창밖의 여자’는 시대의 상흔에 대한 위로였습니다.● 밀리언셀러의 손 ─ 1981~1982년, ‘창밖의 여자’와 국제무대제작 라인을 풀가동하게 만들었다는 앨범 백만 장의 신화를 다룬 기사 옆 사진에서 그의 손은 마이크를 감싸 쥔 채 위로 당깁니다. 소리를 ‘내뿜는’ 손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손. 1982년 도쿄 무대 사진에서는 정갈한 수트, 단정한 미소, 그리고 판소리에서 길어 올린 변성의 궤적이 빛납니다. 국경을 넘은 건 멜로디보다 태도였습니다. ● 왕관을 거부한 가왕 ─ 1986년, ‘상 사양’ 선언연말 시상식의 플래시가 그에게만 집중되자 그는 미소를 띠되, 상패를 한걸음 뒤로 밀어 둡니다. “후배들의 길을 위해.” 기록은 이 순간을 “식상함의 거부”로 남깁니다. 사진 속 거절의 제스처는 조용필식 영광의 사용법이었습니다. 무대를 위해, 노래를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그는 더이상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서울, 북경, 모스크바 ─ 1988~1989년, 회색 도시에 새긴 노래베이징 호텔 무대 사진 한 장은 공연장의 조도보다 관객의 눈동자를 더 밝게 담습니다. 같은 해 서울, 이듬해 모스크바·사할린 기사에는 ‘서울 서울 서울’과 ‘한오백년’이 공존합니다. 전인미답의 길을 그는 누구보다 먼저 지나갔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도시 공연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바람 이후의 정조 ─ 1993년, ‘서울…’의 승리올림픽의 낙엽이 굴러가던 시절, 우울을 노래한 발라드가 뒤늦게 도시의 주제가가 됩니다. 무대 뒤 스탠드에 잠시 기댄 채 먼 곳을 보는 표정의 사진. “신바람보다 항심.” 노랫말의 낮은 파동이 사진의 정적과 겹칩니다. 소란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는 건 목소리의 내구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습니다. 음악과 집 밖에 모른다는 노력하는 가수의 간조로운 삶이 무대의 완성도를 높인것은 아닐까요.● 콘서트의 문법을 바꾸다 ─ 1994~1999년, 장기공연과 오페라극장호암아트홀 장기공연 포스터와 리허설 컷,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방 기사 사진은 대중가요와 클래식 공연장의 경계를 허무는 사건의 기록입니다. ‘대형’이 곧 ‘과장’이 되지 않도록, 그는 음향 체크에 집요한 시선을 보냅니다. 사진의 포커스는 늘 관객석까지 닿아 있습니다. 무대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늘 관객 쪽을 본다는 뜻입니다.● 분단의 섬을 노래로 건너다 ─ 2005년, 평양 공연6·25 50주년 특별 콘서트, 그리고 평양 유경 체육관. 한반도기가 내려오는 장면에서 관객의 눈물과 기립이 사진의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꿈의 아리랑’의 합창은 플래시보다 밝았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무대 위 조용필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관객을 바라봅니다. 이때 사진은 기록을 넘어 사건이 됩니다. 같은 노래가 두 사회를 잇는 다리였다는 사실을, 사진이 증명합니다. 2011년에는 소록도를 찾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 “과거의 조용필은 잊어달라” ─ 2013년, ‘헬로’의 혁신작업실 스탠드 조명 아래, 모니터 앞에 앉은 사진. 수십 년의 습관을 덜어내고 해외 작곡가들과 협업한 19집. ‘바운스’는 박자의 경쾌함보다 표정의 가벼움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선글라스 안쪽 눈빛이 웃고 있습니다. 스스로 틀을 깨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의 초상을 비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시 현재형 ─ 2024~2025년, 20집과 고척돔2024년 발매된 정규 20집 ‘그래도 돼’가 이번 고척돔 컨서트에서도 포함되었습니다. 시대를 버텨나가는 청춘에 대한 응원인것 같기도 하고, 세파를 뚫고 살아온 중장년에 대한 손짓 같기도 합니다. “이제는 믿어, 믿어봐.” 고척돔 콘서트에서 흰 정장과 검은 선글라스의 대비는 여전하되, 관객의 연령대가 넓어졌습니다. 할머니가 “용필 오빠”를 외치고, 20대가 눈물을 훔칩니다. 한 무대에 공유된 서로 다른 시간들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만큼 조용필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조용필의 가사를 맹자 철학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한 홍호표 박사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우주와 인간 본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이 발현된 노래라고 했습니다. 송호근 교수는 “대중가요이기엔 너무 추상적인 그의 노래가 대중의 가슴에 절절한 울림을 일으키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뭇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성직자 같은 가수다. 그가 한때 흠모했다는 스페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세상 풍경을 경쾌하고 애절하게 바꾼다. 우리의 조용필은 마음이 따뜻한 신부(神父)처럼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슬픔을 대면하라고 이른다”고 2008년 10월 28일자 신문에 찬가를 남겼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조용필은 어떤 가사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좋은 댓글로 기억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불 꺼진 고속도로 휴게소 한 카페, 바리스타 로봇 한 대가 묵묵히 손님을 기다립니다. 찬 공기 속 도로 위 쉼터에서 따뜻한 커피 한 모금으로 몸과 마음을 녹여 보는 건 어떨까요. ―괴산 휴게소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법정 기념일인 음력 8월 13일 ‘이산가족의 날’혹시 여러분 주변에 이산가족이나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이 계신가요? 달력을 보니 2025년 10월 4일, 음력 8월 13일은 이산가족의 날입니다. 명절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이산가족들의 의견을 받아 정부가 재작년부터 음력 8월 13일을 법정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문제로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 전쟁,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각 가정마다 하나 정도는 남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이산가족의 여러 형태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이산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선정해 보았습니다.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이산가족을 검색해보니, 처음 그 용어가 기사에 언급된 것은 일본에 있는 한국인의 지위에 관한 한국과 일본 정부 간의 협상에서였습니다. 1964년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은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에 관해 주장하며 소위 ‘이산가족’의 영주권 보장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습니다. 당시 이 기사의 필자는 나중에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의 역할을 하게 된 권오기 기자였습니다. 여기서 ‘이산가족(離散家族)’이라는 용어가 신문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산가족의 이미지는 지난 100년 간 신문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1920년대 신문 곳곳에는,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노동이민을 떠났던 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국을 돌며 교육과 체육 등 선진문화를 알린 후 다시 서울역과 부산항을 통해 미국으로 가는 장면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월남 파병과 2000년대 평화유지군 파병 뉴스에도 어김없이 가족들의 이별과 상봉 장면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많은 이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헤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부가 지정한 ‘이산가족의 날’에서 말하는 가족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가족을 말합니다. ●1971년. 전화선 너머의 울음 ― 한필성‧한필화 남매 동아일보 DB에서 ‘남북 이산가족’ 이미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현대사의 아픔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971년 2월 동아일보는 서울의 오빠 한필성 씨와 북한에서 도쿄로 와 있던 동생 한필화 씨의 전화 상봉 현장을 실었습니다. 국제 전화를 위해 수화기를 붙잡고 ‘피맺힌 대화’를 이어가는 남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분단으로 끊어진 20여 년의 세월이 짧은 통화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첫 남북 판문점 접촉1971년 8월 판문점에서는 남북적십자회담 파견원들의 첫 접촉이 이뤄졌습니다. 송호창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사진은 양측 경비병이 경계하는 가운데 남북 대표단이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새 역사가 숨쉰 8월 20일”이라는 기사 제목처럼, 기자와 카메라들은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터진 새로운 물꼬를 기록하려 애썼습니다. 당시 사진은 긴장된 공기와 취재진의 열망을 동시에 드러내며, 이산가족 상봉의 제도적 출발점을 보여줍니다.● 1983년 KBS 광장,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눈물1983년 여름, KBS는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하루치 방송으로 계획했다 너무 많은 이산가족들이 방송국으로 연락을 해오면서 4개월짜리 특별 방송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무명가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그 시절 하루 종일 방송에서 나왔습니다. 동아일보 기자가 촬영한 사진에는 20년 만에 만난 남매가 뜨겁게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흑백사진에서 눈물이 이렇게 보인다는 것은 눈물의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KBS 본관 앞 광장은 벽보로 빼곡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가족의 이름을 찾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방송은 4개월 동안 이어졌고, 1만 명이 넘는 가족이 다시 만났습니다. ● 68세 아들에게 밥 먹여주는 88세 노모1985년 9월, 남북 고향방문단 교환이 성사되었습니다. 사진 속에서는 짧은 만남이후 남북 형제가 차창 너머로 한명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한명은 차 밖에서는 오열하는 모습이 대비되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진에는항상 만남의 기쁨과 곧 닥칠 이별의 아픔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2000년 8월 서울 삼원가든 만찬장에서는 88세 어머니가 북에서 내려온 아들에게 직접 고기쌈을 먹여주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 흑백의 어린시절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이 열린 2018년 8월 금강산 호텔에서는 86세 양순옥 씨와 북측 동생 량차옥 씨의 작별 상봉 장면이 찍혔습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 들며 흐느꼈습니다.또 다른 사진에는 77세 박춘자 씨와 북측 언니 박봉렬 씨가 작별을 준비하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만남의 시간은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2018년 8월 이후 정부 차원의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는 북한의 거부로 중단되어 있습니다. ● 디지털로 준비된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그동안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의 만남이 온라인으로 가능하도록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을 만들어 상봉 신청과 취소, 영상편지, 유전자 정보 등록까지 이뤄지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행정 창구를 넘어 기억의 디지털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손편지, 사진, 기증 자료, 연표는 한 개인의 아픔을 넘어 민족 전체의 상처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만 있다면 이산가족의 아픔을 어느 정도 해결할 만반의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여지껏 북한은 우리와 달리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공식 채널을 통해 인민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과의 접촉에 소극적이었습니다. 2025년 현재 이산가족 신청자는 13만 4천여 명, 이 중 생존자는 불과 3만 5천 명입니다. 이미 9만 9천여 명이 세상을 떠났으며, 생존자의 3분의 2는 80세 이상 고령층입니다. 상봉의 기회는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이제 눈물까지 말라버린 이산가족들에게는 이번 추석 역시 고통스러운 시간일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다시 만났던 이산가족 중에는 ‘만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좋았겠다’는 고통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달 말 경주에서 APEC 회의가 열립니다. 이산가족들은 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만나고 남북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는 0. 1%의 가능성을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속의 멍한 표정과 눈물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아직 살아 있는 남북의 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그리고 혹시 여러분 주변에 이산가족이 있으시다면, 잔인한 세월을 견뎌 오신 그분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추석이 가족의 명절이라면, 이산가족의 날은 부재한 가족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시간이니까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4357주년 개천절 경축식에서 김민석 국무총리(앞줄 왼쪽)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운데),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오른쪽) 등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날 행사에 불참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잠시 정차한 사이, 곤줄박이 한 마리가 사이드미러 위에 앉았습니다. 차에서 내려야 하지만 작은 손님이 놀라지 않도록 잠시 기다려볼까 합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