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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경기 가평, 광주광역시 등 전국 곳곳에서 극한 호우로 이재민이 속출했습니다. 자연 재해 중에서도 사람의 힘으론 거의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수해입니다. 물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고, 그 길을 막을 수도, 방향을 틀수도 없습니다. 자연이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이 숙제 앞에서, 과연 해결책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수해 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공무원 10명이 폭우로 고립된 80대 어르신 7명을 위해 길이 끊어진 도로를 걸어 20kg의 구호품을 지게로 져서 전달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홍수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쓸어갔습니다. 서울은 한반도 최악의 수해로 꼽히는 ‘을축년 대홍수’로 4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합니다.당시 기사 중에는 수해로 서울에 집이 부족해지자 집값이 폭등해 이재민들이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이번 수해로 홍수에 집을 떠내여 보내고 혹은 무너뜨리고 하여 주택의 곤란을 당하고 있는 리재민들이 매우 다수함으로 자연히 세집의 수요가 등귀하여짐을 따라 집을 가지고 있는 가주(家主)들은 이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자 집세를 나날이 올리는 중인데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 두 장입니다.왼쪽은 서울 남대문역 역사 안에서 임시로 생활하는 수재민들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열차 내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재민들의 모습입니다. 열차 안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암담한 현실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테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을 텐데요. 정치 지도자들이 수해 현장을 직접 찾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동아일보 DB를 찾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그러한 행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59년 9월 1일에는 ‘한강 연변 수재민을 친히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습니다.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 양이 수해 지역을 방문한 기록도 있었고요.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이후로도 대통령들의 수해 현장 방문 사진은 꾸준히 등장합니다.그런데 많은 ‘이재민(罹災民)‘ 사진과 피해 현황에 대한 사진을 살펴보던 중 특별한 기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해 현장을 보도하는 것 뿐 아니라 구호 활동에 직접 나선 신문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925년 7월 23일자에는 청량리에 마련된 구호 캠프 모습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신문사가 만든 구호 캠프였습니다. 커다란 천막 아래 이재민들이 줄을 서서 뭔가를 받고 있는 사진입니다. 1925년 7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본사에서 이재민 임시 수용”이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 당시 동아일보 본사 건물을 임시 거처로 내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구호 활동에 참여한 기록을 지면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1963년 7월 9일자 지면에는 “본사 기탁된 구호금품 1차분 재해대위에 전달”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삼남지구 풍수해 재민들을 위한 겨레의 따스한 손길을 호소해 온 본사에서는, 6월 21일부터 7월 8일까지 정오 현재까지 사회 각계에서 기탁해온 구호금품 중 제1차분을 전국재해대책위원회에 전달하였다. 의류 4,976점, 신발 218켤레, 밀가루 9포, 광목 11필, 비누 3,600개, 기타 물품과 쌀 20가마가 포함되어 있었다.”신문사 이름이 써진 트럭에 구호 물품이 실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언론의 구호 활동’은 197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수해 지역에 도착해 물품을 내리고 돌아오는 트럭 사진은 1987년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왜 신문사가 이 일을 했을까. 지금처럼 국가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 아직 시민단체나 자원봉사 체계가 자리 잡기 전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그 시절, 언론사도 조직력과 기동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처럼 전국에 인쇄 공장을 두고 분산 인쇄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당시 신문들은 서울 본사에서 통합 인쇄하여 각 지역으로 배송됐습니다. 그래서 큰 트럭과 전담 기사들이 수송망의 핵심이었습니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 이후, 국가가 본격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면서부터는, 신문사의 직접적인 구호 역할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9년에는 전국의 기관이 보낸 수재 의연품 트럭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남대문역 열차 안에 몸을 누인 수재민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구호 트럭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난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공동체의 손길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들에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주민센터 안내 아래로 봉제사, 고물상 등 ‘창신 피플’의 일상이 담긴 조각이 줄지어 있습니다. 지역 주민, 만물상을 찾는 손님 모두 반깁니다. ―서울 종로구 창신1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배움 앞에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봅니다.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한 어르신이 길을 걸으면서도 연습에 매진하네요. 어르신에겐 이 거리가 오페라극장 못지않은 무대입니다.―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강동구청 열린뜰에서 어린이들이 ‘안전 홍보 우산’을 들고 있다. 강동구는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노란색과 반투명 소재로 제작된 우산 2578개를 관내 어린이집 222곳에 배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물놀이장에 온 유치원 교사의 한쪽 팔에 물병이 주렁주렁 매달렸네요. 목이 마르면 달려올 아이들도 선생님의 품 넓은 사랑을 느낄 겁니다. ―서울 송파구 성내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내일 일요일은 초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눠지는 삼복(三伏)은 해마다 돌아오는 가장 더운 시기이자, 한 해의 절반을 지나 후반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이기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음식과 휴식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기를 견뎌왔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년 전 초복날을 맞아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는 시민들 풍경입니다. 삼계탕이나 보신탕 가게에 몰려 있는 인파가 아니라 약수터에 몰려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복날에 대한 시선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옛날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매일신보의 1925년 7월 16일자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사진과 같은 날인 1925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今日은初伏복날이란 절기로 보면, 음기가 양기에 눌려 잠복하는 것을 말한다.이 삼복이 지나가면, 차차 눌려 있던 음기는 양기의 세력을 뚫고 나와 생기가 살아난다.비유해 보면, 어떤 힘이 조용히 숨어 있다가 장차 나올 때를 준비하며 희망을 키우는 것과 같다.중국 양휘(楊煇)의 전기에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다가 복날이나 납일(臘日, 섣달 그믐 무렵)에 이르면 양이나 염소를 잡아 술과 함께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는 말도 있다.하지만 실제로는 숨이 막힐 듯한 더운 볕 아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있어,지금쯤이면 보리도 다 익었으니 하루쯤 즐겁게 쉬고 노는 것도 좋을 것이며,또한 그것이 사람의 정이기도 하다.복날에 흰죽과 개고기를 먹는 것도 다 양기를 돋우려는 치열감(治熱感, 더위를 이기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니,이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전해 내려오는 풍습으로 지내는 것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동아일보의 1925년 6월 23일자 기사에도 ‘악박골 물터’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꽤나 명소였었나 봅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악박골’은 현재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의 옛 이름입니다. 악박골 물터는 ‘라듸움’ 성분이 풍부해 일반 속병과 가슴앓이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여름 복날 뿐만 아니라 6월 유두일 등에도 시민들로 북적였었다고 합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도 이곳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한 때 중·노년 남성들에게 복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보신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땠을까 하는 점 말입니다. 기사를 찾아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생각보다 보신탕에 대한 혐오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복날과 관련된 기사를 몇 개 찾아보았습니다. ●1930년대의 여름나기 — 영양과 낮잠, 그리고 ‘여름 타는 사람들’1933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는 복날을 맞아 여름철 건강관리에 대한 조언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기사에서는 특히 더위로 식욕이 떨어지는 사람들, 선천적으로 체질이 약한 어린이, 그리고 여름철 피로감을 호소하는 대중을 위해 수면과 영양 보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뱀장어나 연어 같은 기름진 생선, 보리밥과 현미밥,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추천 식품으로 등장하며, ‘한낮의 낮잠’도 휴양의 방법으로 언급됩니다. 이 시기 복날은 단순히 개고기를 먹는 날이 아니라, 여름을 견디기 위한 종합적이고 실용적인 생활 건강 지침과 맞물려 있었습니다.●1934년 — 조선의 기후와 삼복의 과학적 관찰1934년 7월 23일자 기사는 ‘조선의 여름과 더위’를 주제로, 한반도의 기온 상승과 복날의 기후적 의미를 통계와 함께 설명합니다. 조선의 여름은 지역별로 3개월에서 5개월 반까지 지속되며, 가장 더운 시기[酷暑期]는 7월 하순에서 8월 중순 사이였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삼복 기간은 단지 민간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한반도 전역이 고열에 시달리는 기후학적 절정기였습니다. 대구는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며 ‘조선의 더위의 종가(宗家)’로 불렸습니다. 이 글은 복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문화적·기후적 근거가 모두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1937~1938년 — 복날과 보신탕, 그리고 농민의 고비 넘김1937년 7월 9일자 기사와 1938년 7월 20일자 기사에서는 복날의 문화적 풍속과 음식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구탕’(개장국)은 이열치열로 몸을 보하는 대표적인 음식이었으며, 특히 농민들에게는 더위로부터 회복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1937년 기사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다양한 민간요법이 소개되는데, 개의 간이나 쓸개, 젖 등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술을 끊는 데 쓴다는 전설까지도 전합니다. 개장국에 마늘을 많이 넣는 것을 경계하는 조언도 실렸지만, 이 역시 건강을 위한 궁합의 차원에서 해석됐습니다.1938년 인천에서는 복날을 ‘더위를 쫓는 날’로 삼고 개장국을 먹는 전통이 이어졌으며, 이날은 애써 기른 벼가 한 마디씩 자라는 농사의 중요한 기점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보양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의미까지 함께했습니다.●1954년 — ‘보신탕은 비문화적’이라는 시선의 등장그러나 1954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이전과는 뚜렷하게 달라진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날 초복을 맞아 보신탕에 대한 전통을 언급하면서도 “올해는 비문화적이라는 탈을 쓰고 개장국은 쥐구멍 신세요!”라는 표현이 실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식문화가 아닌 사회적 시선과 가치 판단이 개입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바로 이 기사에서 ‘보신탕은 비문화적’이라는 인식이 등장합니다. 이전까지는 그 효능이나 속설, 조리 방식 등에 대한 긍정적·중립적 서술이 주를 이뤘던 데 반해, 이 기사에서는 개장국을 먹는 행위 자체가 부끄럽거나 퇴행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당시 기사 원문은 이렇습니다. ▲고래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이면 보신탕이라 하여 개장국을 먹고 농촌에서는 천렵(川獵)이 성행되었건만 올해는 비문화적이라는 탈을 쓰고 개장국은 쥐구멍 신세요! 쇠고기 돼지고기 값은 껑충 뛰어 올라 농가에선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지경!아마 광복 후 달라진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서구화된 위생 개념의 확산, 도시인들의 생활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문화적이라는 비판이 시작된 지 70여년이 지난 요즘 보신탕의 설 자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2024년 1월 ‘개 식용 금지법’(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 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고 2027년부터 개고기의 제조와 유통이 전면 금지됩니다. 그나마 ‘영양탕’ 이름으로 유통되던 보신탕은 이제 식당 메뉴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은 100년 전 복날을 맞아, 지금은 사라진 약수터에서 건강한 물을 마시려던 시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여름나기의 방식이 변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소재를 고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100년 전 한반도는 ‘을축 대홍수’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1주일 치 신문 전체가 수해 상황을 보도하는 사진으로만 채워졌습니다. 당시 수해 피해 상황과 이재민들의 모습은 지난 주 “백년사진 No. 121인사동, 폭우의 기억…널빤지와 냄비로 지켜낸 마루” 포스팅에 소개했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수해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속히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참고 기사19250년 7월 15일. 「今日은初伏」1933년 7월 13일. 「초복!오늘부터 三복입니다 여름을 안타십니까? 더위에 여위는 이와 선병질인 아이는 영양과 수면에 주의할 일」1934년 7월 23일. 「朝鮮의 여름과 더위」1937년 7월 9일. 「삼복과 구탕(狗湯) - 복 명절의 의미와 구탕 먹는 까닭」1938년 7월 20일. 「餘滴」1954년 7월 13일. 「오늘 初伏!」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한때는 숲에서 보랏빛 꽃을 달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 싸리나무입니다. 이제는 빗자루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네요. 젊을 땐 꽃으로, 노년엔 빗자루로 사람들을 웃음 짓게 합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태평양이 육지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하루 8시간씩 걸어 335일 만에 미국에 도착한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왠지 설레지 않나요? ―경기 안성팜랜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둔 13일 서울 송파구가 관내 카센터와 함께 구민회관 주차장에서 구민 대상 차량 무상 점검 서비스를 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따가운 햇빛 아래 해바라기 꽃이 만개했습니다. 그 위로 꿀을 모으려는 꿀벌들이 날아듭니다. 꿀벌을 보며 배웁니다. ‘더워도, 일은 해야죠.’ ―경기 안성팜랜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서울 인사동 모습입니다. 서울에 내린 폭우에 완전히 잠겨 버린 거리 모습입니다. 한강과도 떨어져 있는 서울 도심이 물에 잠겨 버린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초반, 서울 인사동은 매년 여름마다 하늘이 뿌리는 재난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수도 행정은 정비되지 않았고, 한양 도성 안쪽을 관통하던 하천과 하수 시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인사동은 한강이 불어날 때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가장 먼저 물이 차오르는 동네였습니다. 1920년도와 1926년에도 인사동이 침수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 1920년 8월 — 참혹했던 한여름의 장대비1920년 여름, 인사동은 말 그대로 ‘물에 잠겼다’. 3차례에 걸친 장대비에 경성 전체가 수해를 입었고, 이촌동, 교동, 묘동, 파고다공원 아래 일대는 해수면보다 낮았던 탓에 유난히 피해가 심했다. “좁은 개천이 일시에 넘쳐” 인사동으로 “좌우로 밀어닥쳤고,” 골목과 상점, 대문과 부엌까지 순식간에 붉은 흙탕물에 잠겼다.물결은 개울을 따라 흐르지 않고 집 안 마루까지 올라왔고, 사람들은 냄비 조각이나 양철통을 들고 물을 퍼내느라 혼이 빠졌다. 시내를 다니던 전차가 완전히 두절되고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와 전신까지 불통되었으므로 경의선 경원선 방면의 통신 두절로 강원도와 경기도 각 지방의 수해가 어떤 상황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인사동뿐 아니라 인접한 낙원동, 재동, 계동, 청진동, 관철동, 창신동 등도 줄줄이 물에 잠겼다.특히 인사동 일대에서는 ‘다리목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집집마다 작은 목다리를 놓아 다니던 인사동에서 폭우로 목다리가 떠밀려가자, 주민들은 떠내려가지 않은 목다리를 차지하려 서로 경쟁했다. 누군가는 집 앞 대문에 다리를 걸어놓고, 전신주나 기둥에 묶어두며 필사적으로 고정했다.●1925년 7월 — 인사동을 휩쓴 또 한 번의 쓰나미5년 후인 1925년 7월, 또다시 쏟아진 장마에 인사동은 비극을 반복했다. 이미 몇 번의 집중호우로 물바다가 된 서울에 7월 11일 새벽부터 다시 폭우가 내렸다. 물은 북악산과 낙산 자락을 타고 재동과 계동을 덮쳤고, 그 아래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는 순식간에 붉은 물에 휩쓸렸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곳 중 하나가 인사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수도였다. “하수도가 불완전한 까닭”에 비가 내리자 물은 도로를 역류해 길바닥으로 솟구쳤고, 길 양옆의 상점과 민가 수십 채가 침수되었다.종로서 관내에서는 인사동 일대의 집 65호가 마루 아래까지 침수되었고, 1호가 마루 위까지 침수되었고, 집 한 채는 완전히 무너졌다. 우체통 하나마저 쓰러졌고, 경복궁 돌담은 4간 길이로 무너졌다. “물은 길 위로 넘쳐서” 사람들은 길이 아닌 물 위를 걸어야 했으며, 관훈동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비는 하루 종일 내렸고, 침수된 가옥은 전체 종로서 관내만 해도 150여 호에 달했다. 특히 인사동은 바닥이 낮은 지형이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1926년 7월 — 바람과 비, 불까지 겹쳤던 날1926년에는 단순히 물난리만이 아니었다. 장마가 끝날 즈음, 폭우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시내 곳곳의 낡은 공가(空家)가 무너졌고, 그중 인사동에서는 무너진 폐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부녀자 두 명이 사망하는 참극까지 벌어졌다.인사동 일대의 하천은 또다시 범람했고, 광화문 통과 톄신국(체신국) 일대는 물론, 인사동·관훈동에도 길이 잠겨버렸다. 당시 총독부는 피해 조사에 나서고, 시찰 차량을 투입하며 “자동차 안에서 응급조치”를 지시했다고 하나, 주민들에겐 그저 허망한 구호였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견뎠고 누군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다. 수해가 반복되자, 동아일보사는 1925년에는 자체 구호반을 조직했다. 인사동 주민을 위해서는 “중앙예배당”을 임시 수용소로 지정했고, 밥을 먹을 곳조차 없던 이들에게는 “식료품과 거처의 주선”을 약속했다. 당시 신문은 “집이 무너져 갈 곳이 없거나, 침수로 인해 침식을 할 수 없는 이는 본사로 통지하면 구호반이 출동해 현장에서 방편을 취하겠다”고 적고 있다.■ 인사동은 원래 물이 모이는 자리였었네요. 조선시대에는 관청과 사찰이 많았던 이곳이, 일제강점기에는 골목과 골목 사이 민가로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집은 많은데 하수도와 배수시설이 턱없이 부족 했고, 바로 곁에 청계천이 흐르는 지형상 매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엇습니다. 청계천이 수해의 원인이었던 셈입니다. 수해가 나면 인사동 사람들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자연과 싸웠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문을 닫고 널빤지 등으로 물을 막았고, 양푼을 들어 물을 퍼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텼습니다. 폭우가 지나가고 나면 주민들은 무너진 담장을 수습하고, 떠내려간 집기들을 건져내며 삶의 자리를 되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신문사를 비롯해 뜻이 있는 단체들이 힘을 모아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1926년 이후 기사에서 인사동이 큰 수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공사 중이어서 오히려 수해의 원인이 되었던 하수관 공사가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서울이 수해라는 자연재해를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인사동을 다룬 3년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앞에서 보여드렸던, 1925년 인사동 수해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모습의 사진을 소개해 드립니다. 당시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 사진기자로서 당시의 사진이 제대로 인화지로 보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PDF 파일의 형식이라도 당시 이미지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참고기사1920년 8월 3일. 「京城의水害慘狀, 一個月間에三次大洪水」1925년 7월 12일. 「市內外水害罹災民」1925년 7월 13일 「市內水害狀况」1926년 7월 16일. 「再昨日의暴風驟雨 市內의浸水狀態」1926년 7월 18일. 「中部以北을中心으로 旱災後의暴風雨」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가게 앞 전등에 누군가 ‘웃는 얼굴’을 그려 놓았네요.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짓게 됩니다. 웃음은 마음속 어둠을 밝혀 주는 작은 등불입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 사진입니다. 철창 안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코끼리 부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지만 이곳은 한 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유락 시설이었습니다. 글의 끝부분에서 사진 몇 장도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궁이 동물원으로 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는데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확장했습니다.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입니다. 창경궁의 전각들이 대거 철거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들이 건립되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궁에서 원으로 바뀐 것이지요.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서울의 명소였습니다. 1917년 4월 22일에는 하루에만 무려 1만 2966명이 입장을 해 당시 서울 인구 25만 여명 대비 5%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우선 백년 전 사진의 주인공인,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의 사연을 읽어보겠습니다. 상군부처(象君夫妻 入園)창경원 동물원에는 지난 2일 오후에 새 식구 둘이 늘었다. 이는 그 안에서 몸집도 크 중 크거니와 날마다 구름 같이 모여드는 많은 손님들의 큰 인기를 끌던 홀애비 코끼리가 작년 이 맘때에 세상을 떠난 뒤로 그 방주인이 없더니 이번에 싱가포르로부터 코끼리 부부가 일본 神戶(고베)에 와서 유죽(有竹)이라는 일본 사람 동물 장사의 중매로 바다를 건너 인천에 와서 차를 타고 와서 그 방 주인이 되었는데 그들의 나이는 일곱 살과 여섯 살이며 몸값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 두 식구가 는 대신에 그 웃방에 있는 하마(河馬)한 부니 그 대신 동물 장사 손으로 가게 되었다하며 부부의 금슬이 끔직이 좋은 모양인데 이번에는 그 부부가 가끔 운동을 할 만한 운동장을 훌륭하게 만드는 중이라더라.1925년 7월 4일자 동아일보■ 코끼리 부부가 동물원에 도착한 대신 하마 한 마리가 일본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코끼리 말고 다른 동물들은 궁궐이었던 창경원에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을까요? 서울에 있던 동물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궁금해서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 새 사자와 ‘사자원숭이’… 동물원은 시험 중1924년 7월, 창경원 동물원에는 서인도 출신 ‘사자원숭이’(獅子猿) 한 쌍과 함께 젊은 사자 두 마리도 새로 들어왔다. 사자원숭이는 얼굴과 꼬리에 사자와 닮은 털이 나 있어 이름 붙여진 동물로, 한 쌍에 150원가량이라 전해졌지만, 아직 시험 양육 중이었다. 새 사자들은 일본 유전(有田) 동물원에서 이송된 두 살 된 개체로, 만약 적응에 성공하면 기존의 늙은 사자 두 마리에 1,500원을 더 얹어 교체할 계획이었다. 기존 사자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어미(14세)와 딸(8세)만 남은 상황이었다.● 창경원은 봄 소풍 1번지, 동물들도 봄앓이1933년 4월, 창경원은 서울 시민의 봄맞이 행락지로 인기를 끌었다. 진달래,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창경원을 찾았다. 코끼리, 호랑이, 곰, 사자 등 동물들 또한 ‘봄의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하염없이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며 몸을 비볐다. 원앙과 두루미는 물 위에서 춤을 추었고, 잔디밭에는 푸른 새싹이 솟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봄을 즐긴 그 풍경은 창경원의 대표적 장면이었다.● 호랑이의 비극, 창경원 첫 사고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이 항상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1933년 3월 30일, 창경원 호랑이가 우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6세 아이를 할퀴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는 평안남도에서 상경한 가족의 아들 김태하로, 어머니와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다가선 순간 변을 당했다. 어머니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창경원 개원 이래 최초의 중대한 참변이었다.● 겨울 코끼리, 서민보다 따뜻한 방에1957년 겨울, 창경원의 코끼리는 유리문으로 둘러싸인 스팀 난방실 안에서 월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겨울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코끼리는 따뜻한 방에서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다. 한편, 같은 시기 북극곰은 오히려 생기를 발산하며 활발하게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군 장군이 기증한 곰, 창경원으로1955년 4월, 미극동지상군 총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자신이 기르던 3살 된 수컷 곰 한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간단한 기증식에는 미군과 서울시장이 참석했고, 8군 군악대와 의장병이 동원되며 의식은 장식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창경원의 재건에 보탬이 되고자 한 기증이었다.■창경원은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과거와 일제의 통치 전략, 그리고 도시민의 일상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울던 코끼리, 춤추던 홍학, 관람객을 할퀸 호랑이, 겨울을 버티던 동물들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1년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고 철거와 이관 작업을 하면서 1986년 8월 23일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아일보 DB 속에 있는 창경원의 옛날 모습 사진 몇 장을 소개하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기사 (동아일보)〈상군부처 入園〉/1925년 7월 4일〈昌慶苑에 새손님〉/1924년 7월 8일〈郊外에賞春客沙汰 昌慶苑에만萬名〉/1933년 4월 17일〈동물원 암 호랑이가 六歲 兒를 할켜 重傷〉/1933년 4월 1일 (석간)〈테將軍의 ‘곰’ 昌慶苑서 寄贈式〉/ 1955년 4월 19일〈겨울철 서민층보다 나은 ‘코끼리’〉/ 1957년 12월 3일〈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2024년 9월 12일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구상의 시 ‘꽃자리’에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모인 아령들이 단돈 1000원에 팔리고 있네요. 하지만 곧 주인을 찾아 자신만의 꽃자리를 펼치겠죠. ―서울 동묘시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손끝에 놓인 투명 구슬에 아이들이 정신을 뺏겼습니다. 구슬에 담긴 것은 자신들의 모습이지만, 아이들은 구슬을 통해 다른 세상을 봅니다. ―서울 송파구 성내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9일 오후 경기 안성시 안성팜랜드에 만개한 해바라기 밭을 시민들이 거닐며 휴일을 만끽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장마가 주춤했던 지난 주말, 여기저기 나들이를 했더니 몸이 좀 더러워졌네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며 상쾌한 발걸음을 위해 준비 중입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라디오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작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1925년 6월, 조선에서도 마침내 전파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풍경은 특별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그 첫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을 소개합니다. ● 1925년 6월, 음악이 전파를 타다동아일보 1925년 6월 26일자 6면에는 ‘무선전화 정기 시험방송’ 기사와 함께 아주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체신국 시험방송실에서 음악을 방송하는 장면입니다. 헤드폰을 쓴 방송국 직원 앞에 기타를 든 서너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방송실 안에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마이크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연주하는 이들은 조선 땅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송출한 사람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무선전화매주 네 차례 정기 방송음악과 일기예보, 뉴스 등을 방송〉O체신국에서 시험적으로조선에도 ‘라디오’ 열풍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최근에는 사설 무선전화 설치를 당국에 신청하는 이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경성 시내에서만 허가를 받은 사람이 70여 명에 이르고, 허가 없이 무단으로 설치한 곳도 수백여 곳에 달한다. 이에 따라 체신국에서는 일반 무선전화 청취기 설치자들의 편의를 위해, 종전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 낮 시간에 시험 방송을 하던 것을 변경하여,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일요일의 네 차례씩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반 동안 방송을 하기로 하였다.체신국 내 방송실에서 기사, 일기예보, 음악 등 다양한 흥미로운 내용을 교대로 방송하며, 21일부터 일반 청취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O청취 출원자부산, 원산, 인천, 수원 등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청취 장비 설치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체신국에서는 현재 방송실에서 사용하는 집음 장치(소리를 모으는 장치)가 매우 불완전하고, 방송용 기계도 부족하여 이대로는 무선전화 애호가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따라서 당국은 방송 장비를 다시 설치할 방침으로 여러 방안을 고려 중이다. 얼마 전에는 도쿄에서 돌아온 포원(浦原) 체신국장이 시찰한 도쿄 방송국의 집음 장치와, 근등(近藤) 사무관이 시찰한 관동청 체신국 내 시험 방송실의 장비 등을 참고하여, 현재 체신국 방송실의 장비와 설비를 개선하려 하고 있다.또한 경성 시내는 물론, 원격지 청취 신청자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방송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예산만 확보된다면, 방송실을 현재 체신국 근처에 새로 짓겠다는 의향으로 모든 사항을 조사 중이다.민간 측에서도 방송국 설치를 희망하는 자가 10여 단체나 되는 상황이어서, 당국에서는 이들이 하나로 연합해 재단법인을 설립한 뒤 허가를 내줄 방침이다.특히 청취 신청자 중에는 일본에서 방송하는 것까지 듣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어서, 경성 방송국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실험적 의미로 일본 방송국의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다만 일본 방송국의 승인이 있는 경우에만 허가할 예정이며, 현재 일본 방송국과 협의 중이다.O무허가 장치허가 없이 장비를 설치한 사람에 대해서는 무선법 제16조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단속 인원을 각 반에 나누어 시내 전체를 순찰하며 무허가 장치 소지자들을 적발할 예정이다.하지만 신청 절차는 복잡하지 않다. 체신감리과에서는 ‘사설 무선전화 시설원(私設無線電話施設願)’이라는 신청 용지와 기타 절차에 필요한 내용을 인쇄하여 희망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다.O가정용 청취장비 설치 방법과 기계 설비 등은 다양하다. 무선전화 청취기를 상점에서 완제품으로 구입하려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일정한 가격은 없다. 직접 만들 수 있는 부분은 만들고, 못 만드는 것만 사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하면, 가정용 청취기는 불과 5~6원 정도에 설치할 수 있다.기계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사서 남에게 의뢰할 경우, 가까운 거리의 방송을 혼자서 들을 수 있는 장비라도 15~16원에서 20원 정도는 들 것으로 보인다.최근 체신국에서 산촌정일(山村靜一) 씨를 통해 조립한 청취기 같은 경우는 귀에 대고 듣는 수화기 외에는 실비가 90전밖에 들지 않는다.설비에 있어서는 수신용 공중선(안테나)을 높이 달수록 좋지만, 특히 가정에서는 그리 높게 할 필요 없이 지붕 위에서 전선 하나를 늘여서 설치해도 무방하다. 실내에 설치하는 청취기는 각 부품을 잘 맞추어 조립해두면, 기계에 특별한 고장이 없는 한O영구적 비용 절감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앞으로 조선에서도 외국처럼 민간 방송국이 설치되면, 청취기 설치자에게 약간의 청취료만 받고 들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한다. (계속)● 음악을 기다리던 마음, 60년 뒤의 어느 여름사진으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1980년대, 필자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도 음악은 여전히 기다려야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무대를 본 다음 날, 친구들은 집에서 라디오로 녹음한 테이프를 자랑하듯 들고 다녔습니다. 마이마이나 워크맨에 테이프를 넣고, 이어폰을 나눠 끼운 채 조심스레 노래를 들려주던 그 시절. 라디오에서 신청곡이 흘러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던 밤도 많았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고, 곡이 끝나면 재빠르게 정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테이프에는 매직펜으로 “1986년 6월 신곡”이라고 제목을 써넣었습니다. 동네에는 직접 엽서를 써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낸 누나들도 있었습니다. 사연이 채택될지 모르는 긴장과 기대 속에서, 우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부모님은 라디오에 빠진 자녀를 걱정했지만, 그건 우리가 시대와 소통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가 오늘날 유튜브나 쇼츠에 몰두한 자녀들을 바라보며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건 그 시절 우리 부모님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언젠가는 잘 성장하지 않을까요?● 라디오, 음악을 전해 준 설렘부터 문화체험의 통로까지 1920년대 조선은 라디오라는 신문물을 처음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924년 체신국은 부산과 대구에 수신기를 설치하고, 용산 무선국에서 송신하는 신호를 수신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후 1926년, 조선호텔에서는 무선방송국 설립을 위한 발기인 회의와 총회가 열렸고, 민간의 참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1929년 쯤 라디오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교육과 정보, 문화의 매체로 조선 사회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음을 당시 라디오 방송 편성표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29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편성표입니다. 라디오 방송 (1929년 9월 9일, 월요일)오전10:00 기상 개황, 전국 각지의 날씨 실황10:30 요리 정보, 일용품·시사 정보11:00 [가정 강좌] 어린이의 구강 위생 (1) — 박준대 강사정오12:00 시보(정오 알림), 뉴스오후2:20 음악, [라디오 학교]2:10 [여성 강좌]3:45 뉴스6:30 음악 동화7:10 강연 — 「조선 동요 작곡에 대하여」 이종태7:50 뉴스8:00 연주회가. 서곡 — 빠른 장조나. 메누에트다. 회전조(선율)연주: 제1 바이올린 — 홍란파 / 제2 바이올린 — 홍재유곡명: 장조 이중주곡 (보케리니 작곡)밤9:35 라디오 체조9:50 내일 방송 순서 발표, 기상 개황, 전국 각지의 날씨 실황, 뉴스 (재방송), 시보10:20 남도 단가 독창 — 김정문, 북 연주 — 정순명이제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조선의 누군가는 라디오의 방향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전파를 타고 흐르는 음악을 처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이번 주 백년사진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파를 타고 음악이 흘러나온 날의 풍경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 속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여러분의 기억과 상상을 댓글로 나눠주세요.참고 기사 (동아일보)1924년 7월 6일자 : 무전방송 시험1925년 6월 26일자 : 무선전화 정기 방송1926년 2월 13일자 : 무전방송 총회1926년 2월 17일자 : 방송국 발회1927년 1월 21일자 : 라디오 대회1929년 9월 9일자 : 라디오 편성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린이집에서 산책 나온 아이들이 노란 띠를 꼭 쥐고 걸어갑니다. 친구들과 발걸음을 맞춰야 하지만 함께라서 안전합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신발 도매상가의 한 가게에 모양과 높이가 다양한 굽이 빼곡히 쌓여 있네요. 이 굽들은 어떤 구두와 짝을 이루게 될까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