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命]권노갑 회고록<23>권정달 부인의 생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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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때문에 남편이 희생… 자리로 보상해 주셔야죠”

○자유총연맹

1987년 6·29선언 직후 직선제 쟁취와 구속자 석방에 환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김대중 김영삼의 오른쪽 옆에 한복을 입은 사람이 양순직이다. 동아일보DB
1987년 6·29선언 직후 직선제 쟁취와 구속자 석방에 환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김대중 김영삼의 오른쪽 옆에 한복을 입은 사람이 양순직이다. 동아일보DB
양순직 의원(2008년 작고)은 본래 충남 논산 출신으로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공화당 국회의원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김대중 선생과 뜻을 같이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 해군정훈장교로 목포해군사령부에서 근무할 당시 목포선박주식회사 김대중 사장, 그리고 훗날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호실장을 맡게 되는 목포해군헌병대장 박성철 장교와도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6대 국회 때 재경위원장을 지냈고 김대중 의원 역시 재경위원이었던 까닭에 깊은 친분을 쌓았다. 그는 5공 때 동교동과 상도동의 합작으로 탄생한 민추협에서 민헌련 최고위원으로 동교동계를 줄곧 도왔다. 그러나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돌풍을 일으킬 때 거기에 합류하도 했다.

정주영 후보가 낙선한 뒤 다시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입당했고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분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자유총연맹 총재에 임명돼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문제는 2000년 한나라당의 권정달 의원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발생했다. 민주당 경북도지부장이 된 권정달 의원은 그해 4월 13일 안동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자 권정달 후보의 부인인 도영심 씨가 “당신들 때문에 민주당에 들어와 희생된 것이니 보상해 달라”고 떼를 썼다. 보상의 구체적 내용은 자유총연맹의 총재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민주당에 입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은 전국 정당을 지향하고 있어 영남 출신의 정치인이 아쉬운 처지였다. 또 경북도지부장 자리를 권정달 의원에게 넘겨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

○경북도지부장

나는 14대 국회의원 시절, 목포 지구당 위원장을 김홍일 의원에게 물려주고 경북 안동갑 지구당위원장과 민주당 경북도지부장을 자청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둔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한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뿌리 찾기’의 의미도 없지 않았다.

사실 나는 광복 전 어머니 손을 잡고 두 번인가 대구를 찾아갔던 것 말고는 내 뿌리나 고향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내가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에 어른이라고는 없었으니 그런 일을 가르쳐 주고 챙길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어머니가 준 족보를 이사할 때마다 소중히 가지고는 다녔지만 족보는 단지 장롱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자신의 뿌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1988년, 내 나이 59세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축하 전화인가 하고 수화기를 건네받은 나는 깜짝 놀랐다.

“노갭이 아잽니꺼?”

전화 속 남자는 다짜고짜 나를 ‘노갭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경상도 억양으로.

내가 얼떨떨하게 전화를 받으니 상대방은 자기가 내 조카라면서, TV로 개표 중계방송을 보고 있던 자기 어머니가 ‘노갭이 아재’가 당선되었다고 전화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방님 댁 맞능교? 노갭이 서방님 댁 맞지예?”

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 나는 전화를 건 여인이 어릴 때 우리 집에서 한 2년간 같이 살았던 사촌 형수라는 걸 알았다.

대구에 내려가 족보를 맞춰보니 내 원적은 경북 달성군 하빈면 감문동 575였다. 거기서 확인한 것이지만 나는 안동 권씨 급사공파의 후손이었다.

실로 반세기 만에 걸려 온 사촌 형수의 전화를 계기로 나는 예순이 다 된 나이에 비로소 나의 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후 자청해서 국민회의 안동을 지구당 위원장과 경북도지부장을 맡았다. 나는 경상도에 뿌리를 두고 전라도에서 태어났으니 정치적으로 지역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셈이 아닌가.

바로 그 자리를 권정달 의원에게 넘겨주었던 남다른 인연으로 인해 내가 나서서 자유총연맹 중재역을 맡게 된 것이다.

○사퇴 종용

나는 신라호텔에서 양순직 총재를 만났다. 자유총연맹은 행정자치부 소관의 관변단체였으므로 최인기 행자부 장관과 함께 그 자리에 나갔다.

이 자리에서 나는 양 총재의 사퇴를 종용했다.

당시 양 총재는 가벼운 중풍기로 말이 어눌해져 공식 행사조차 힘든 형편이었고, 개인적인 빚 때문에 채권자들이 그의 봉급을 압류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가지를 지적하고, 특히 봉급 압류의 소문이 퍼져나가면 전국의 회원들이 반발할 여지가 있으니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일단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양 총재는 담담한 표정으로 “일주일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는 “사퇴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후 자유총연맹 총재의 빈자리는 권정달 씨에게 돌아갔다.

언제나 우리를 도왔던 양 총재에게조차 나는 악역을 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4·8 항명파동’으로 與서 제명된 양순직 ▼

野의 장관해임안에 찬성표… “3共 국회 가장 충격적 사건”


“그것은 3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 총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부결시키라고 지시한 사안에 대해, 여당 의원들이 세를 모아 야당 안(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이런 일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없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당시 공화당의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 민주적이었다는 예가 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자유총연맹 총재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양순직 전 의원이 2002년 발간한 회고록 ‘대의(大義)는 권력을 이긴다’ 중 한 대목이다.

양순직이 ‘3공화국 들어선 이래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고 표현한 사건은 바로 1969년 4월 8일 국회를 통과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안.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던 터라 권오병 해임안의 표결은 개헌 정국의 전초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결시키시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박정희는 공화당 지도부에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JP(김종필)계를 비롯한 공화당 내 3선 개헌 반대세력은 집단 찬성표를 던졌다. 이른바 ‘4·8 항명파동’이다.

당시 3선 개헌 반대의 선봉에 섰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증언. “JP 라인은 이번 기회에 해임안을 통과시켜 버려야만 박 대통령도 국회의원들을 맘대로 할 수 없다고 느껴 3선 개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박정희는 노발대발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장례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조기 귀국을 지시할 정도였다. ‘음성적으로 야당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킨 자’에 대한 색출 지시가 내려졌고, 그 결과 의원 5명이 제명됐다. 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김달수, 정태성 의원이 그들이었다. 이만섭은 이후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경질을 포함한 5개항의 선행조건을 내걸고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수용했다.

흔히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으로 불리는 3선 개헌안을 반대한 공화당 국회의원은 정구영 의원(1978년 작고)이 유일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경찰의 발포 책임을 물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던 법조계 원로로, 양순직은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배출한 정치지도자 중 가장 훌륭한 분 중 한 분이었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정구영의 아호는 청람(靑嵐), 맑은 아지랑이라는 뜻이다. 양순직은 아호처럼 살다간 정구영의 사진을 평생 간직하며 그를 흠모했다.

박정희도 그를 “선생님”이라고 깍듯하게 모셨다. 그런 박정희의 ‘진정성’을 받아들여 정구영은 초대 공화당 총재까지 맡았지만 결국 3선 개헌과 유신에 절망해 탈당하고 만다.

이후 반독재 전선에 앞장섰던 정구영은 어느 날 서울 북아현동 집으로 4·8 항명파동의 주역 5명을 불렀다. “앞으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은 김대중이다. 여러분도 내 뜻에 따라 달라.” 유훈 아닌 유훈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권노갑#권정달#자유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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