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우리의 소리를 배우게 하라[기고/김중현]

  • 동아일보

김중현 국립민속국악원장
김중현 국립민속국악원장
2004년 국립극장에서 처음 디지털 국악감상회를 열던 날을 기억한다. 국악기 음원을 디지털 데이터로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동료들은 “국악을 왜 파일로 만드느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시도는 작은 예고편이었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은 프롬프트 몇 줄로 노래를 만들고 영상을 제작한다. 전통문화예술은 지금 그 전환 앞에 서 있다.

문제는 선명하다. AI 작곡 프로그램에 가야금, 대금, 해금을 입력해도 실제 국악기 음색과는 거리가 먼 소리가 나온다. 서양 악기나 이웃 나라의 현악기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국립국악원이 음색과 장단 데이터 구축을 시작했지만, AI가 학습하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시김새(꾸밈음)와 창법, 장단의 미세한 결, 판소리의 호흡까지 담아낸 한국 고유의 ‘소버린 AI’가 필요한 이유다.

필자는 국악작곡을 전공했고, 대학국악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졸업 후 예술행정의 길을 걸으며 작곡을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과거 국악작곡은 20∼30년의 공력을 쌓은 이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인정받는 영역이었다. 그 깊이와 내공은 지금도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AI 시대에는 창작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판소리 다섯 바탕과 산조, 민요와 궁중무용이 제대로 디지털화되어 AI가 학습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전통의 언어로 창작할 수 있다.

최근 한국과 중국 합동 공연을 수차례 진행하며 변화의 속도를 실감했다. 무대 위에는 AI 영상이 배경으로 흘렀고, 공연 사진은 즉석 편집돼 QR코드로 공유됐다. AI 스마트글라스는 언어의 장벽마저 낮추고 있었다. 기술은 이미 공연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수백 년을 전해 내려온 사랑의 서사, 지리산과 섬진강이 품은 판소리와 농악의 숨결, 달빛 아래 광한루의 이야기들은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 콘텐츠 원석이다.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상 제작,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 유통 분야에서 빠르게 진화한 기술 생태계와 협력해야 한다. 그것은 문화주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주권을 지키며 AI 시대의 글로벌 콘텐츠 경쟁에 참여하는 전략이다. 전통문화유산 지식재산권(IP)을 보호하는 법적 기반과 우리 고유의 데이터를 안전하게 축적하고 활용할 기술력이 그 토대가 되어야 한다.

정부의 AI 정책은 의료, 국방, 안전 등 전략 산업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음악, 무용, 장인 기술 등 살아 숨 쉬는 전통문화유산 역시 AI 시대의 핵심 자산이다. 춘향의 서사와 판소리의 숨결이 살아 있는 도시는 AI 전통문화 디지털 시범도시와 AI 영상센터의 최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지역 예술인과 청년 창작자들이 참여하는 실험 공간까지 더해진다면 그 파급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모델은 다른 지역의 고유 자산과 연계돼 세계와 연결되는 AI 전통문화 콘텐츠 생태계로 확장될 수 있다.

AI는 전통을 대체하지 않는다. 전통을 번역하는 도구다. 판소리 시김새 하나, 춤사위 한 동작의 결, 옻칠 한 겹의 손맛이 데이터가 되는 순간, 비로소 전통은 AI의 언어가 된다. 2004년 국악기 음원 하나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던 일이 오늘의 가능성을 예고했듯이, 전통문화예술의 미래는 기술을 두려워하는 데 있지 않다. 가장 한국적으로, 동시에 가장 세계적으로 디지털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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