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등번호도 없던 예비선수… ‘공책에 쓴 다짐’ 골로 증명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13일 01시 40분


[2026 북중미월드컵] 1차전 역전골 터뜨린 오현규
특급 공격수 계보… 꿈이 현실로
‘4년뒤엔 당당히 18번 달겠다’… 인생 첫 월드컵서 주인공으로
38도 고열에도 일낸 ‘추어탕집 아들’
“남들 이유식 먹을때 난 추어탕에 밥”… 부친, 가게 닫고 멕시코 날아와 응원

한국 축구 대표팀의 공격수 오현규(오른쪽)가 12일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체코와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1-1로 맞서던 후반 35분 황인범의 낮은 크로스를 받아 슛으로 연결하고 있다. 오현규의 왼발에 걸린 공은 체코 골키퍼의 오른팔을 맞고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오현규의 결승 골에 힘입어 한국은 2-1로 역전승했다. 사포판=AP 뉴시스
한국 축구 대표팀의 공격수 오현규(오른쪽)가 12일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체코와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1-1로 맞서던 후반 35분 황인범의 낮은 크로스를 받아 슛으로 연결하고 있다. 오현규의 왼발에 걸린 공은 체코 골키퍼의 오른팔을 맞고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오현규의 결승 골에 힘입어 한국은 2-1로 역전승했다. 사포판=AP 뉴시스
한국과 체코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이 열린 12일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 양 팀이 1-1로 맞선 후반 24분 한국 대표팀 공격수 오현규(베식타시)는 주장 손흥민(LA FC)과 교체돼 그라운드를 밟았다. 오현규는 11분 뒤 황인범(페예노르트)이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낮게 띄운 크로스를 몸을 던지며 왼발 슈팅으로 연결했다. 오현규의 발을 떠난 공은 체코 골키퍼의 팔에 맞고 굴절돼 골문으로 들어갔다. 생애 처음 월드컵 무대에 선 ‘등번호 18번’ 오현규가 한국의 2-1 승리를 이끌며 마침내 주인공이 된 순간이다.

이날 점심 식사 직후 열이 38도까지 오르는 등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던 오현규다. 그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골을 넣으려고 그렇게 아팠던 것 같다”며 웃었다.

등번호 없는 유니폼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의 오현규(오른쪽). 7번을 달고 있는 손흥민과 달리 ‘예비 선수’였던 오현규는 등번호 없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 
동아일보DB
등번호 없는 유니폼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의 오현규(오른쪽). 7번을 달고 있는 손흥민과 달리 ‘예비 선수’였던 오현규는 등번호 없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 동아일보DB
4년 전 카타르 월드컵 때만 해도 오현규는 존재감이 없는 선수였다. 수원 삼성 소속이던 그는 월드컵 직전 안와골절 수술을 받은 손흥민의 회복이 늦어질 경우를 대비한 ‘예비 선수’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26명의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27번째 태극전사’로 불렸다. 훈련은 함께했지만 등번호가 없는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오현규는 훈련 뒤 숙소로 돌아와 ‘4년 뒤엔 당당히 등번호 18번을 달고 (월드컵에) 오면 된다’고 공책에 적었다. 18번은 ‘황새’ 황선홍(58), ‘라이언 킹’ 이동국(47)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공격수들이 달았던 등번호다.

카타르 월드컵 이후 셀틱(스코틀랜드)에 입단하며 유럽 생활을 시작한 오현규는 헹크(벨기에)를 거쳐 2월 베식타시(튀르키예)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2025∼2026시즌 튀르키예 리그에서 13경기에 출전해 6골을 기록했다. 유럽 무대에서 빠르게 성장한 오현규는 2024년 7월 홍명보 감독이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북중미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고 이날 자신이 한국 축구의 18번 계보를 이을 특급 공격수라는 걸 입증했다.

한국은 이날 후반 14분 체코의 라디슬라프 크레이치에게 먼저 골을 내줬지만 후반 22분 황인범이 동점골로 균형을 맞췄다. 제공권을 앞세운 체코는 후반 33분 토마시 소우체크가 프리킥 상황에서 헤더로 한국의 골망을 흔들었지만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그로부터 2분 뒤 오현규의 역전골이 나왔다. 경기 흐름이 다시 체코로 넘어갈 수 있었던 상황에서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오현규가 ‘홍명보호’, 더 나아가 한국 축구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오현규의 골로 한국은 2010 남아공 대회 이후 16년 만에 월드컵 조별리그 첫 판을 승리로 장식했다. 오현규는 “4년 전에 형들이 하는 걸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떨지 않고 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발 출전했던 손흥민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활짝 웃으며 오현규를 끌어안았다.

오현규의 아버지 오해선 씨는 이날 경기장에서 아들을 응원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추어탕집을 운영하는 그는 가게 문을 잠시 닫고 멕시코로 날아왔다. 오현규는 과거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다른 아이들이 이유식을 먹을 때 나는 추어탕에 밥을 말아 먹었다”면서 “추어탕만 만 그릇 이상 먹은 것 같다. 좋은 체력을 갖게 된 비결”이라고 한 적이 있다.

오 씨는 본보에 “남들이 자녀에게 보약을 먹일 때 우리는 형편이 좋지 않아 현규에게 추어탕을 보약 삼아 매일 먹게 했다”면서 “월드컵에서 아들이 결승골 넣는 모습을 보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기 전 아들에게 ‘오늘은 네가 가장 행복한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 큰 무대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해줬다”고 덧붙였다. 오현규는 이날 경기 후 “(월드컵이 끝나는) 한 달 후 부모님이 다시 가게 문을 열지 않으셔도 되게끔 내가 남은 경기를 더 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월드컵 본선 참가국이 기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어난 이번 대회는 각 조 1, 2위에 자리한 24개국과 3위 중 성적 상위 8개국이 32강 토너먼트에 오른다. 스포츠 통계 전문 회사 ‘옵타’는 A조 1차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2-0으로 제압한 멕시코(1위·12일 현재)와 한국(2위)의 32강 진출 확률을 각각 98.2%와 92.8%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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