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받은 불가리아 출신 작가
하루 만에 초판 매진-문학상 석권
◇슬픔의 물리학/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민은영 옮김/448쪽·1만8000원·문학동네
미로처럼 얽힌 이야기들 사이로 개인적인 슬픔부터 가족사, 나아가 역사와 신화가 펼쳐진다. 2023년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층마다 과거가 재현된 병원 이야기를 담은 소설 ‘타임 셸터’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았던 저자의 전작. 고국인 불가리아에서는 이 작품이 수상작보다 먼저 출간됐다. 독특한 콘셉트로 불가리아에서는 출간 하루 만에 초판이 소진됐고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이 소설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가 자기 삶과 가족사를 되돌아보는 과정을 다룬다. 화자는 소년 시절 타인의 슬픔을 통로로 삼아 그들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는 ‘병적 공감 증후군’을 겪는다. 그는 불가리아에서의 소년기와 정서적 거리감이 컸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전쟁과 정치적 혼란, 해외 생활을 거치며 느끼는 낯섦과 소외를 계속 되짚어 나간다. 여기에 고전 미노타우로스 신화가 끊임없이 끼어들면서 신체적·정서적 이질감 속에서 고립된 인간을 상징하는 ‘미로’를 형상화한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전통적 단선형 플롯 대신 미로 같은 구조를 취한다. 장편 소설이지만 짧은 이야기와 회고, 일기 형식의 기록, 명세서 같은 목록, 사진에 대한 감상, 심지어 양자 물리학의 용어까지 섞이며 장르와 형식이 계속해서 변한다. 화자와 타인의 시점이 빈번하게 교차하고, 일인칭과 삼인칭이 오가며 독자는 내가 지금 누구의 내면을 읽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우리가 슬픔을 어떻게 기억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구성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단순히 자전적인 슬픔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작위적인 기록으로 펼쳐 보이며 공감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임 셸터’의 기발한 구성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전작인 이 작품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형식적인 실험이 난해할 수 있지만, 감성적인 깊이가 더해져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형식에만 치중한 차가운 소설이라기보단 유머와 아이러니를 가미해 슬픔을 부드럽게 다듬는다. 장르적으로도 가족 소설, 역사 소설, 신화적 우화, 철학 과학적 사유가 한 권에 섞여 장르를 뛰어넘는 ‘다층적 문학’으로도 볼 수 있다.
책 제목에 있는 ‘슬픔’은 불가리아어 단어 ‘tuga’를 번역한 것이다. tuga의 뜻은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자, 인생이 미끄러져 가고 있으며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모든 이유로 어떤 일들은 결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라고 저자는 인터뷰에서 정의했다.
소년의 시선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미로는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강력한 욕망, 그러나 그 욕망은 마침내는 좌절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깨달음,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만으로는 이뤄내기 어렵다는 허무와 절망에 관해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넌지시 던져진 공허함과 허무 속에서 역설적으로 축복은 대단한 성취가 아닌 살아있는 것 그 자체임을 소설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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