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기[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24일 23시 06분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는 집착합니다. 잃어버림에 대한 두려움이 바탕에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의 집착은 기묘합니다.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밀어낼수록 불안은 증폭되고, 불안을 잠재우려고 더 강하게 매달립니다. 놀란 상대가 더 멀리 밀어내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집착이 미움으로 끝납니다. 부모와 자식, 연인, 부부 사이에서 말입니다.

사랑과 미움의 긴장 상태는 생존의 문제로 시작했습니다. 아기는 엄마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취약한 존재입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제때 젖을 주는 엄마’는 좋은 대상, 기다림의 고통을 주는 엄마는 나쁜 대상으로 분리돼 각인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같은 엄마에게 좋음과 나쁨이 모두 포함돼 있음을 깨닫고, 이것이 자아 발달의 바탕이 됩니다. 어른이 되었어도 타인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주관적 대상으로만 여길 때, 집착이라는 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영국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은 상대를 독립된 인격을 가진 ‘객관적 존재’가 아닌 자신의 내적 욕구와 환상을 채워주는 ‘주관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집착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는 “너는 나의 일부이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폭력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뜻대로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분노하고 공격하며, 상대의 저항을 오히려 더 강한 집착의 명분으로 삼습니다.

집착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파멸적으로 작용합니다. 집착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당하는 사람의 삶도 소모됩니다. 관계는 단절되거나 위태로운 상태로 유지되며, 범죄나 삶의 종말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집착하는 당사자가 스스로 성찰해 이 굴레를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은 집착을 사랑으로 합리화합니다. 전문가의 도움도 대개는 거부합니다. 집착의 대상이 된 피해자가 싸움의 양상을 주도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목표는 집착하는 상대의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첫째, 논리적인 설득이나 주변의 훈계에 기대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은 상대의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이기에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 사람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어떤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흔들려서 흥분하거나 위축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의 위협이나 호소에 휘둘리면 역설적으로 “너는 나의 일부”라는 상대의 주장을 강화해 주는 겁니다.

셋째, 비난이나 보복으로 맞대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숨 막히니 그만하라”는 절규나 공격은 상대에게 또 다른 집착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고통스러워도 버티며, 자신이 상대의 부속물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독립적 개체임을 존재 자체로 증명해야 합니다. 넷째, 물리적 혹은 심리적 경계를 상대가 넘었을 때는 법적 도움을 포함한 외부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비워둔 경계를 다시 바로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결국 집착하는 상대와의 싸움은 상대가 만든 환상의 감옥에 갇히느냐, 아니면 나의 자유로운 위치를 지켜내느냐의 다툼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상대의 눈물이나 분노에 마음이 약해져 스스로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미안해. 사실 나에겐 너밖에 없어”라는 말로 달래서 잠시 평화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제 발로 감옥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환상의 나’가 아닌, 현실의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도록 상대에게 시간을 벌어줘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현실의 실체임을 끊임없이 보여줄 때, 비로소 상대가 환상 속에서 마음대로 만들어 낸 장난감 역할에서 내가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인 동시에, 상대에게도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길입니다.

요점은 내가 가진 단단한 존재감을 상대에게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막막하게 들리실 겁니다. 어렵고 어렵지만 상대 마음속에서 내가 ‘내 마음속의 너’가 아닌 ‘내 밖의 진짜 너’로 전환돼야 해결됩니다.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는 환상이 아닌 현실에 기반을 둬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그 사람이 만든 감옥에 가두려 한다면 그것은 어떤 관계에서도 사랑이 아닌, 소유욕일 뿐입니다. 진정한 관계라면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타자임을 같이 인정하는 거리감 위에서 시작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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