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유시민의 ABC론과 ‘예송 논쟁’

  • 동아일보

유시민, ‘뉴 이재명’에 기회주의자 낙인
‘타협 없는 검찰개혁’을 절대가치화
백성은 굶어죽는데 ‘喪服’ 놓고 사생결단
현대판 예송논쟁에 민생 뒷전 안 돼야

천광암 논설주간
천광암 논설주간
진보 진영의 장외 스피커로 통하는 유시민 작가가 18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쏟아낸 발언들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특히 그가 들고나온 한 장의 벤 다이어그램이 진보 진영의 담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수박 논쟁 시즌2’를 예고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가 내놓은 벤 다이어그램은 일견 단순해 보인다. A는 가치지향형 그룹, B는 이익지향형 그룹, C는 가치-이익을 둘 다 중시하는, A와 B의 교집합 그룹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도식 안에는 무서운 정치적 ‘암수’가 도사리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지난 9개월여간 진보 진영 내부의 주도권 경쟁은 ‘급격한 검찰개혁’과 ‘실용과 민생 등 안정적인 국정 운영’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친청(친정청래) 대 친명(친이재명)’ ‘올드 이재명 대 뉴 이재명’의 구도를 형성해 왔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김어준-유시민의 지원 사격을 등에 업고 강행하려 했던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 같은 것들이 이런 구도를 확연히 드러낸 대표적인 충돌 지점들이었다.

하지만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에 발을 딛는 순간 이런 구도는 흔적도 없이 해체된다. 우선 ‘순혈주의’가 두 집단을 가르는 새로운 구분선이 된다. 유시민 작가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가치를 중시하는 A그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이재명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진보 진영의 코어 지지층이다. 이른바 ‘적통’으로 자리매김된다. 이에 비해 B그룹은 출세나 선거 출마를 위해 대통령 주변에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로 그려진다. ‘뉴 이재명’ 그룹은 진보 진영 내에서 제대로 된 ‘족보’가 없는 뜨내기 기회주의자들로 비하되는 셈이다.

여기에 도덕적 우월주의 잣대가 하나 더 추가된다. 유 작가의 분류법에 따르면 A그룹은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치(올바름)에 기반을 두는 사람들이고, B그룹은 이익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이다. A그룹은 이재명 대통령이 잘못돼도 떠나지 않을 충심의 아이콘이고, B그룹은 “겨울이 오면 제일 먼저 떠나고 돌 던질” 배신의 아이콘으로 그려진다.

마치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와 소인배의 대비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서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유 작가가 ABC 벤 다이어그램을 통해 짜놓은 판은 조선 후기 예송(禮訟)논쟁과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많다. 그가 말하는 ‘가치’에 ‘검찰개혁’ 대신 ‘예’를 놓고, 정청래-유시민-김어준의 자리에 ‘서인(西人)-노론(老論)’을, ‘뉴 이재명’ 또는 ‘친명’ 그룹의 자리에 ‘남인(南人)’이나 ‘서인-소론(少論)’을 놓으면 된다.

노론의 영수로 예학의 대가였던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과 ‘예’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산림(山林)’에 앉아서도 천하를 호령했다. “주자의 책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주자학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반대파들을 ‘사문난적(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몰아 제거했다. 물론 송시열도 종국에는 당쟁의 희생자가 됐고, 그가 추구한 것이 유교적 이상정치였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예송논쟁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유시민의 교조주의적 강경론도 주자학이나 예학에 대한 송시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사-기소 분리’라는 원칙에 단 하나도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 부작용이 생기면 어떡하느냐고? “나중에 보완하면 돼요”라는 것이 유 작가가 올해 2월 초 김어준의 유튜브에 출연해서 내놓은 답이다. 급진적인 변화로 인해 나타나게 될 형사사법의 혼선이나,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입게 될 피해는 아예 관심 밖으로 보인다.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 어디에도 정치와 무관한 국민이나 민생이 설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송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지배계층이 예송논쟁에 빠져 있던 17세기 후반은 민생이 최악의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다. 가뭄, 홍수,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끊이지 않았고 전례 없는 대기근이 팔도를 휩쓸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백성의 고통을 전혀 돌보지 않고,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 다툼에만 몰두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유시민의 벤 다이어그램과 강경 지지층의 공세에 발목을 잡혀 검찰개혁이 국민의 편익과 눈높이에서 멀어지거나, 국정 기조가 실용과 통합 대신 배제의 문법으로 끌려 들어가선 안 된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고유가-고환율-저성장’의 벼랑 끝에 선 민생이 정치투쟁의 뒷전으로 밀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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