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AI발(發) 공포로 소프트웨어 업종 시가총액이 약 1조 달러 증발했다.” 2월 초 월가에 공포가 엄습했다. 미국의 인공지능(AI) 기업 앤스로픽이 내놓은 AI 업무 도구 ‘클로드 코워크’의 산업별 플러그인(특화 기능)이 공개되자 서비스용 소프트웨어(SaaS) 주식이 일제히 폭락한 것이다. 톰슨로이터는 하루 만에 15.8% 하락해 사상 최대 낙폭을 기록했고, 리걸줌 등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SW) 기업들도 두 자릿수 하락세를 보였다. 세일즈포스, 워크데이 등 대형 SW 기업들의 주가 역시 동반 하락했다.》
클로드 코워크는 개발자나 전문가가 아니라도 코딩과 법률, 금융 분석 등의 지식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때문에 “AI가 기존 SW를 대체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AI 스타트업 중 하나에 불과했던 앤스로픽은 이제 월가의 판도를 뒤흔드는 존재로 부상했다. 2월 앤스로픽은 시리즈G 투자에서 300억 달러(약 44조 원)를 조달하며 기업 가치 380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이는 기술기업 역사상 두 번째로 큰 비공개 자금 조달이다.
오픈AI 떠난 남매, AI 안전 기치를 들다
앤스로픽의 출발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픈AI다. 공동 창업자인 다리오, 다니엘라 아모데이 남매는 오픈AI 핵심 임원 출신으로, AI 개발 속도와 안전성 간 균형에 대한 방향성을 두고 경영진과 차이를 겪은 뒤 2021년 동료 7명과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 자사 AI 모델에 행동 원칙을 학습시키는 ‘헌법적 AI(Constitutional AI)’라는 독자적 훈련 방식은 앤스로픽을 안전한 AI 개발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회사의 성장 속도는 경이로웠다. 2022년 여름 첫 클로드 모델 훈련을 마쳤지만, 안전성 검증을 이유로 바로 공개하지 않았다. 2023년 3월 클로드를 정식 출시한 이후 기업 고객을 빠르게 확보했다. 아마존은 2023∼2024년 총 80억 달러를 투자했고, 구글은 2023년 10월 5억 달러 투자에 이어 추가 15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2024년에는 오픈AI 출신 얀 라이케, 존 슐먼, 뒤르크 킹마 등이 합류하며 인재 확보 경쟁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소비자 시장에서는 챗GPT만큼의 인지도는 없지만, 기업 시장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매출의 약 80%가 기업 고객에서 발생하고, 포천 10대 기업 중 8곳이 클로드를 사용한다. 연간 100만 달러 이상을 지출하는 고객도 500곳을 넘어섰다. 2년 전에는 12곳에 불과했다. 덕분에 매출 성장세도 가파르다. 2025년 초 10억 달러였던 연간 반복 매출(ARR)은 같은 해 말 90억 달러로 늘었고, 올해 3월에는 190억 달러를 돌파했다. 불과 1년여 사이 10배 이상의 성장을 보인 것이다.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약 670억 달러에 이른다.
최근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LX’에서 앤스로픽은 “광고가 AI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클로드는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내며 오픈AI를 정조준했다. 이에 대해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기만적(deceptive)”이라고 반박했지만, 슈퍼볼 이후 클로드의 일일 활성 사용자는 11% 늘며 주요 AI 챗봇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개발자 혁명 도구 된 ‘클로드 코드’
2025년 초 공개된 ‘클로드 코드’는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깃허브 코파일럿’이 코드 한 줄씩 제안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클로드 코드는 기능 구현부터 배포까지 전체 워크플로를 처리하는 ‘에이전틱 코딩’ 도구다. 마이크로소프트(MS)조차 자사의 깃허브 코파일럿을 판매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클로드 코드를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2월 기준 클로드 코드의 ARR은 25억 달러에 달한다. 여기에 클로드 코워크가 영업·법무·재무 등으로 적용 영역을 넓히면서 앤스로픽은 ‘엔터프라이즈 AI 플랫폼’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앤스로픽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2월 말 미 국방부는 앤스로픽을 ‘공급망 위험’으로 지정했다. 통상 적대국 기업에 적용하던 조치를 미국 기업에 내린 것은 이례적이다. 국방부는 클로드를 모든 합법적 목적에 사용하길 요구했지만,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자율 무기’와 ‘대규모 시민 감시’라는 두 가지 기준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앤스로픽은 소송으로 맞섰고, MS·구글·아마존은 비군사 분야에서 클로드 서비스를 계속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전이라는 강점이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앤스로픽은 2025년 12월 기업공개(IPO) 준비에 착수했다. 2026년 하반기 상장에 나설 경우 3800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를 평가받으며 역대 최대 규모의 기술 기업 상장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IPO 카운트다운과 월가 전망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시선은 엇갈린다. 긍정론자들은 엔터프라이즈 AI 시장에서 앤스로픽의 지배력과 견고한 고객 기반에 주목한다. 기업 고객은 다년 계약을 체결하고 워크플로에 깊이 통합되며, 전환 비용도 높다. 미 기업 경비관리 플랫폼 ‘램프’에 따르면 자사 플랫폼 기업 5곳 중 1곳이 앤스로픽에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1년 전 25곳 중 1곳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 또 앤스로픽 AI 유료 고객의 79%가 오픈AI에도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나타나 ‘양자택일’이 아닌 ‘병행 사용’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다.
반면 회의론자들은 현재의 가치 평가가 지나치게 낙관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경쟁 심화로 기술적 해자(경쟁 기업이 쉽게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자원 기반의 경쟁 우위)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오픈소스 모델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면서 ‘클로즈드 소스’ 모델의 프리미엄이 축소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AI 시대, 양심의 무게
앤스로픽은 분명 독특한 기업이다. 오픈AI를 떠나 ‘안전한 AI’를 내세운 창업자들이 5년 만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성장했다. 기업용 AI 시장에서 코딩 도구와 에이전틱 AI를 앞세워 확고한 입지를 다졌고, SaaS 업계에 공포의 대상이 될 만큼 파괴적인 혁신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안전 제일주의’라는 이 회사의 DNA는 양날의 검이다. 펜타곤 블랙리스트 사태에서 보듯 윤리적 원칙을 지키는 대가는 수십억 달러의 매출 감소로 돌아올 수 있다. 아모데이 CEO는 “양심에 비춰 그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주주와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매출은 빠르게 성장세를 보이지만 아직 흑자를 내고 있지는 않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컴퓨팅 비용 부담은 여전히 크다. 2025년 약 30억 달러를 소진했고 수익성 달성 시점은 2028년으로 예상된다. 오픈AI, 구글 제미나이, 메타 라마 등과의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메타의 오픈소스 전략은 유료 모델의 프리미엄을 위협한다. 앤스로픽 역시 미국 내 데이터센터에 500억 달러, MS의 클라우드서비스 애저에 3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하는 등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앤스로픽은 AI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이 회사의 독특한 행보는 ‘AI 시대 기업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월가에서 앤스로픽은 ‘차세대 구글’과 ‘거대한 버블’ 사이 어딘가에 있다.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월가는 이미 베팅을 시작했다.
필자(최중혁)는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삼성SDI America, SK Global Development Advisors 등을 거쳐 미 실리콘밸리 소재의 사모펀드 팔로알토캐피탈(Palo Alto Capital)을 설립해 운용하고 있다. ‘트렌드를 알면 지금 사야 할 미국 주식이 보인다’ ‘2025-2027 앞으로 3년 미국 주식 트렌드’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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