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로 위장한 CIA 첩보원 토니 멘데즈가 만든 위장 영화 ‘아르고’ 포스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 이란 내 반정부 시위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2월 말 미국은 이란을 ‘부당 구금 지원국’으로 지정한 뒤 공습하며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발생한 주이란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을 언급했다. 이번 전쟁에 대한 정치적 명분의 하나로 47년 전 이란의 적대 행위를 소환한 것이다. 당시 미국에 군사작전 실패라는 상처를 남기고 444일 만에 해결됐지만, 스파이들에게는 신분 위장의 정석을 보여준 최고의 비밀공작을 탄생시켰다.
‘캐나다의 대담한 작전(Canadian caper)’으로 명명된 이 공작은 혁명 시위대가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공관원 52명을 억류하는 과정에서 캐나다 외교관 집으로 피신한 미 공관원 6명을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미국은 인질로 억류된 공관원들에 대한 외교적 해결이 실패한 상황에서 공관원 일부가 피신한 사실이 노출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미 중앙정보국(CIA)은 위장 전문요원 토니 멘데즈를 투입해 피신 중인 공관원 구출에 착수했다. 그가 구상한 작전은 이들을 영화 촬영차 이란에 입국한 캐나다 국적의 영화 제작팀으로 위장시켜 빼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CIA는 캐나다 정부의 협조로 이들의 캐나다 여권을 만들고, 할리우드에 실제 영화 제작자 명의로 ‘Studio Six’라는 영화사를 설립했다.
완벽한 위장을 위해 영화사 사무실을 임차하고 명함과 계약서를 만들고 전화 응대는 물론이고 언론 홍보도 했다. 또한 ‘아르고(Argo)’라는 제목의 영화 시나리오와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이란의 검증에 대비했다. 1980년 1월 준비를 마친 멘데즈는 아일랜드 출신 영화사 로케이션 스카우트 담당자라는 위장 신분으로 이란에 입국했다. 그는 캐나다대사관의 도움으로 은신해 있는 미 공관원들을 만나 캐나다 여권과 위조된 입국 서류를 전달하고 탈출 계획을 교육했다.
공관원 6명에게 영화 제작 스태프라는 위장 신분에 맞게 개인별 직책과 역할을 부여하고 공항 출국 시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준비시켰다. 이란이 이들의 피신 사실을 알아채기 전에 작전을 신속히 실행해야 했다. 이에 멘데즈 입국 후 72시간도 안 된 시점에 작전이 진행됐는데, 공항 직원들이 밤샘 근무에 지치고 교대를 앞둔 이른 아침 항공편을 택해 탈출했다. 영화 제작이라는 탁월한 공작 아이디어와 위장 신분에 대비한 탄탄한 준비, 캐나다의 전폭적 지원이 성공 요인이었다.
이 공작은 멘데즈의 저서 ‘위장의 대가(The Master of Disguise)’를 바탕으로 2012년 ‘아르고’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아르고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스파이들에게는 겉모습을 바꾸는 변장보다 공작 활동에 필요한 신분에 맞게 외향은 물론이고 내면까지 변화시키는 위장이 더 중요하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이 시리아 최고위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시리아계 사업가로 완벽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위장은 정보 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첫 단추이자 스파이를 지키는 보호막이다.
그런데 오늘날 폐쇄회로(CC)TV를 비롯해 지문과 안면 인식 같은 생체 인식 기술이 스파이들의 신분 위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이 휴민트의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