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동산 시장, 정부가 ‘다주택자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죠. 다주택자들이 항복하고 급매를 내놓으면, 무주택자들이 저렴하게 집을 장만하고 부동산 가격 급등을 잠재울 거라고 보는 건데요.
그럼 ‘1가구 1주택 실거주’가 기본이 된 세상에선 집값 걱정과 투기 열풍이 사라질까요? 자가 보유율 세계 1위의 나라, 싱가포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이 있어도 집 걱정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집은 단순한 거주 수단이 아닌 ‘욕망의 재화’이기 때문이죠. 싱가포르의 ‘똘똘한 한 채’ 열풍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나랑 분양 신청할까?”라며 청혼하는 나라. 싱가포르는 ‘1가구 1주택 실거주’를 실현한 공공주택 정책으로 전 세계의 찬사를 받지만, 여전히 젊은층은 집이 걱정거리다. 싱가포르 주택개발청 제공
90.8%. 싱가포르의 주택소유 비율은 단연 세계 1위입니다. 1960년대부터 펼친 싱가포르만의 독특한 주택 정책 덕분이죠. 국민의 80%는 주택개발청(HDB)이 건설한 공공주택에 거주합니다.
전 세계 도시 계획가의 찬사를 받는 싱가포르식 공공주택 모델. 이게 가능했던 건 일단 국토의 약 90%가 정부 소유이기 때문이고요. 또 모든 근로자가 월급을 20%씩 강제저축해 조성한 막대한 ‘중앙적립기금’이 뒷받침됐습니다. 무려 700조원이 넘게 적립된 이 기금이 싱가포르 공공주택 건설의 거대한 자금줄 역할을 하죠.
왜 사람들이 기꺼이 공공주택에 사냐고요? HDB 주택은 법적으론 ‘99년 장기 임대’이긴 한데요. 사실상 소유한 것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입주민은 5년 의무 거주기간(일부 인기 지역은 10년)만 채우면 이걸 팔 수 있죠. 만약 99년 임대로 분양 받았는데 5년이 지났다면, 나머지 94년치 권리를 재판매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시세 차익을 챙길 수 있는 거죠.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DB)이 최근 분양한 공공주택의 조감도. HDB 제공 물론 공공주택은 ‘콘도미니엄’이라 불리는 민간주택처럼 엄청 고급스럽진 않아요. 민간 콘도미니엄은 단지 내 수영장, 헬스장 같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보안요원이 상주해서 훨씬 호화롭죠. 하지만 비슷한 입지·크기라면 공공주택은 가격이 반값 이하입니다. 관리비도 훨씬 저렴(월 몇만원 수준)하고요. 가성비 면에선 비교가 되지 않죠.
나중에 팔아서 시세 차익을 챙길 수 있다니, 솔깃하신가요? 물론 아무나 공공주택을 분양받을 순 없죠. 일단 외국인이나 다주택자는 불가능하고요. 기혼 가구인 경우엔 월 소득 1만4000싱가포르달러(1600만원) 이하여야 신규 분양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미혼이면 소득과 나이 요건이 더 까다롭고요(월 소득 7000싱가포르달러(800만원) 이하이면서 35세 이상). 또 미혼자는 작은 평형(거실+방1개 구조)만 분양받을 수 있다는 제한도 있어요.
‘1인 가구는 35살까지 기다리라니 너무하다’라는 청년층 불만도 터져나오는데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해야 하는 정부로선 제도 변경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랑 BTO 신청할래?
이런 제도 때문에 싱가포르엔 독특한 청혼 문화가 생겼습니다. 청혼할 때 ‘나랑 결혼해줄래?’ 대신 이렇게 묻는 거죠. “나랑 BTO 신청할래(Shall we BTO)?”
BTO(Build-to-Order), 즉 공공주택 신규 분양 신청을 함께 하자는 아주 로맨틱한(?) 제안입니다. 보통 분양 당첨부터 입주까진 4-5년 걸리는데요. 결혼 전 분양 신청을 한 뒤, 나중에 입주하기 전까지만 혼인신고를 마치면 되거든요. BTO 물량 대부분은 생애 첫 신청자에 몰아주기 때문에 신혼부부에 유리한 편입니다. 만약 5년 안에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둘이 얼른 함께 BTO부터 신청해야죠.
한국에선 보통 결혼 날짜를 정하고 그에 맞춰 집을 구하죠. 싱가포르는 그 반대예요. BTO에 당첨되고 입주날짜가 정해지면 그에 맞춰 결혼식 날짜를 잡곤 하죠.
싱가포르에선 BTO(공공주택 신규 분양 신청)를 함께 한다는 게 곧 결혼을 준비한다는 걸 의미한다. 사진은 주택개발청이 젊은 커플들에게 BTO 준비용 앱(BTOgether)을 이용하라고 홍보하는 이미지. 만약 공공주택에 당첨됐는데 입주 전에 헤어지면 어떻게 되냐고요? 당연히 입주권은 날아가고, 이미 낸 예약금과 인지세까지 포기해야 합니다. 손해가 막심하죠. ‘BTO 위약금이 무서워서 결혼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인데요.
그래도 합리적 가격으로 공공주택을 분양 받을 수 있으니, 싱가포르 신혼부부들이 부럽다고요? 제도로 보면 확실히 그런데요. 실제 사례를 들여다 보면 좀 복잡합니다. 왜? 다들 원하는 입지가 비슷하다보니, 쏠림현상이 극심하기 때문이죠.
싱가포르는 국토가 서울보다 20% 정도 큰 나라인데요. 서울에서도 강남, 강북이 다른 것처럼, 싱가포르도 입지에 따라 선호도 차이가 큽니다. 특히 자동차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보니, 지하철역 근처냐 아니냐가 중요한데요.
도심 중심부와 가깝고 학군이 좋으면서 편의시설이 풍부하고 지하철(MRT)역과 가까운 아파트. 이런 인기 단지는 경쟁률이 수십대 1까지 치솟기도 합니다. 반면 도심과 떨어진 외곽지역은 경쟁률이 일대 일에도 못 미치는 미달 사태가 벌어지곤 하죠.
싱가포르 공공주택은 품질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입지에 따라 거주 환경의 차이가 크다보니, 선호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HDB 제공 퀸즈타운, 부킷 메라 같은 ‘서울 강남급’ 입지만 고집하다가 줄곧 BTO에 떨어지는 사례는 매우 흔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공급을 늘렸다는데 왜 내 집은 없냐!’라는 항의도 이어지는데요.
아니, 신혼 때는 좀 외곽에서 살다가 돈 모아서 나중에 더 좋은 집으로 가면 되지,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입지 타령이냐고요? 바로 여기서 싱가포르 공공주택 제도의 아이러니가 드러납니다. 저렴한 공공주택이 단순한 내 집 마련 수단이 아닌 자산증식의 통로가 되어버린 거죠. ‘똘똘한 HDB 공공주택 한 채’를 생애 최초로 분양 받는 건 싱가포르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건 국가가 지원해 주는 일생일대의 로또이자 저위험 고수익의 투자 기회이니까요.
정부가 지원하는 합법적 로또
도심과 가깝고 조망 좋은 싱가포르의 핫한 주거지 부킷 메라. 30평대 신축 고급 콘도미니엄 가격이 320만~450만 싱가포르달러(약 37억~52억원)를 호가하죠. 서울로 치면 반포 내지 압구정 같은 입지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도 공공주택은 들어섭니다. 지난해 10월 부킷 메라에 공급된 30평대 공공주택 분양가는 58만 싱가포르달러. 우리 돈으로 6.7억원인 거죠. 만약 싱가포르 시민권자인 신혼부부라면 최대 12만 싱가포르달러(1.4억원)의 보조금을 주기 때문에, 실질 구매가는 그만큼 낮아집니다. 우리로 치면 반포 신축의 국민평형 아파트를 5억원 대에 분양받을 수 있는 거죠. 주변 시세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건데요.
이렇게 분양받은 공공주택, 의무거주 기간(10년)이 끝나면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현지 부동산 분석 업체들은 최소 150만 싱가포르달러(17억원), 조망 좋은 고층은 200만 싱가포르달러(23억원)는 충분히 갈 거라고 내다봅니다. 업자들의 설레발 아니냐고요? 이미 지난해 이 지역 준신축 공공주택의 재판매 가격이 130만 싱가포르달러(15억원)를 찍었거든요.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그 정도 상승은 충분히 가능하겠죠.
싱가포르 부킷 메라 지역에서 분양 중인 콘도미니엄(민간주택)의 조감도. 수영장과 헬스장 같은 편의시설이 갖춰져 고급 호텔 같은 분위기다. 싱가포르에서 신축 콘도미니엄은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promenadepeak.live 왜 그렇게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핵심지 분양’에 목매는지 아시겠죠? 이들에게 첫 BTO 공공주택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자산 뻥튀기를 위한 일종의 투자 상품이죠. 의무 거주 기간(5년 또는 10년)이 끝나자마자 집을 팔아 시세차익을 챙긴 뒤, 이를 발판으로 고급 민간 콘도미니엄으로 ‘업그레이드’해 갈아타는 것. 싱가포르에선 이게 중산층 도약을 위한 성공공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이 핵심지 공공주택 당첨인 거고요.
‘소박한 46만 달러(5억2000만원) BTO로 시작해 민간주택으로 이사한 뒤 345만 달러(40억원)에 매각한 여정.’ 소셜미디어엔 이런 류의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주로 부동산 중개 업자들이 투자를 부추기려 만든 영상인데요.
이런 영상이 강조하는 건 두가지이죠. ①‘똘똘한 HDB 한 채’ 청약 당첨은 정부가 지원해주는 일생일대의 투자 기회다. 당장 신청하라! ② HDB에 만족하고 계속 살면 절대 안 된다. 의무기간만 채우고 얼른 민간주택으로 갈아타라! 이와 관련한 수많은 성공사례를 열거하며 젊은층의 자본주의적 열망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열망
공공주택이 로또처럼 변질되면서 나타난 ‘BTO 광풍’. 당연히 싱가포르 정부로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죠. 그래서 2024년 10월 정부는 전례 없는 강한 규제를 내놨습니다. 일부 인기 지역의 의무거주 기간을 2배로 늘렸고요(5년→10년). 이 지역에선 나중에 집을 팔았을 때 매매가의 6~12%를 ‘보조금 환수’ 명목으로 국가에 반납하게 했죠.
하지만 이런 규제도 똘똘한 한 채를 향한 열망은 꺾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수익률이 낮지만 당첨확률 100%인 곳, 10여 년 뒤 대박이지만 당첨확률이 10%도 안 되는 곳. 기회가 한 번이라면 둘 중 뭘 택하는 게 합리적일까요. 평생 한 번 뿐인 생애 첫 보조금 혜택인데, 가장 수익률 높은 곳에 베팅하게 되지 않을까요.
공공주택이 만든 싱가포르의 ‘자가 보유율 91%’ 신화. 하지만 국민이 부유해질수록 더 좋은 집, 더 비싼 집을 향한 욕망은 점점 커진다. HDB 제공 싱가포르 공공주택 모델은 1961년 ‘버킷 호 스위(Bukit Ho Swee) 대화재’ 참사를 계기로 탄생했어요. 화재로 잿더미가 된 무허가 판자촌에서 리콴유 당시 총리가 “정부가 여러분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콘크리트 집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요. 이를 현실화한 게 HDB 공공주택이었는데요.
하지만 60여 년이 지나 싱가포르는 1인당 GDP 9만 달러(1억3000만원)의 부자 나라로 성장했고요. 이 나라 젊은이들은 이제 단순히 ‘판잣집이 아닌 깨끗하고 안전한 집’에 사는 것만으론 더이상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주거안정이란 필수적 욕구가 채워지자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는 건데요. 그 본능을 과연 누가, 무슨 정책이 막을 수 있을까요. ‘1가구 1주택 실거주’라는 성공 신화를 쓴 싱가포르가 맞닥뜨린 풍요의 역설입니다.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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