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 인촌 김성수 선생
민족교육 중앙학교 경영하는 등
어둠의 시대 ‘선각자의 삶’ 그려
◇인촌탐사/이진강, 황호택 지음/372쪽·2만4000원·나남
1908년 어느 날 전북 군산.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남성이 상투를 잘랐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渡航證)을 막 얻은 참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부안군 줄포에 있는 집안 어른들은 장손인 그의 유학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일본행 배를 타기 이틀 전, ‘모친 급환’이란 편지와 함께 줄포에서 머슴이 그를 데리러 왔다. 급히 본가로 가던 남성은 편지가 자신의 일본행을 만류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채고 다시 군산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부모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쓰고 상투 자른 사진을 찍어 보낸 뒤, 친구와 함께 시모노세키행 배에 오른다.
그는 훗날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이다. 함께 유학한 친구는 그의 평생 동지로 동아일보사 사장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다. 만약 두 사람이 당시 유학을 가지 않고 발길을 되돌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촌탐사’는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이진강 인촌기념회 이사장과 황호택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인촌 선생의 발자취를 탐사한 책이다. 책 표지에 실린 문구 ‘밝은 길을 찾아가다’는 인촌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는 저자들의 취재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6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인촌은 자신의 꿈이던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백두산에서 이름을 따온 ‘백산학교’ 설립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는 불허했다. 하지만 인촌은 부친을 설득해 얻어낸 자금으로 1915년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처음엔 이마저 허가하지 않던 총독부의 세키야 학무국장을 설득할 당시 대화가 전해진다.
“청년을 교육해서 무얼 하려는가.”(세키야) “우리 민족도 남과 같이 잘 살게 하고 싶소.”(인촌) “바보 같은 소리!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총독부가 잘하고 있다.”(세키야) 하지만 인촌은 대학 인맥까지 동원해 결국 허가를 얻었고, 중앙학교는 3·1운동의 책원지(策源地)이자 민족교육의 터전이 됐다.
인촌은 첫 부인 고광석 여사를 여읜 뒤, 정신여학교 학생으로 3·1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경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이아주 여사(1899∼1968)와 재혼했다. 이 여사의 애국정신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전언에 따르면 이 여사에겐 일본 순사에게 채찍으로 맞아 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인촌의 넷째 아들 김상흠(1919∼1991)은 1939년 항일결사 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했다가 일제에 적발돼 1년 넘게 복역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사건으로 연락책이던 며느리 고완남(1920∼1991)도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혹한의 함흥형무소에서 아이를 유산했다. 저자들은 “인촌은 첩첩산중에 밤길을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관련 장소를 직접 다니며 ‘발로 쓴’ 책이어서 현장의 분위기가 살아있다. 이 이사장은 “인촌이야말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격랑의 해방공간을 살면서 민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라의 독립,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온 힘을 쏟은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문화민족주의자이자 인간자본의 표상임을 깨닫게 됐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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