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미술사 버린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바꾸다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3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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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의 자르디니 전시장의 ‘추상화’ 섹션. 전통적 미술사가 놓친 작가들을 대거 소개한 이 전시는 테이트 모던이 2000년 개관할 때 보여준 방법론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현대 미술을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은 미술에 대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없어” 작품을 볼 줄 모르고, 그래서 “현대 미술은 어렵고 난해하다”고 겁을 먹기도 하죠.

이때 흔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다,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용어들, 또 그 사조가 갖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나 영국 테이트 모던 같은 미술관에 가면 이런 사조를 지우거나 감추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 ‘사조 지우기’가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라면 어떨까요?

국제 미술사를 이끄는 미술 기관들의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미술은 이제 ‘아는 만큼 보인다’가 아니라 ‘보이는 만큼 안다’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강력하게 실천해 온 기관 중 하나인 영국 테이트 모던의 개관 멤버이자, 명예 관장인 프랜시스 모리스를 만났습니다.

요즘 미술관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모리스와 인터뷰를 통해 소개합니다.

전통적 미술사를 버린 미술관
4월 11일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프랜시스 모리스.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명예 석좌교수로 국내 강단에 서게 된 그를 3일 이화여대에서 만났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입체파, 추상표현주의 같은 단선적인 흐름의 미술사로는 미국, 유럽, 남성 예술가의 작품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어요.

(20세기 미술사를 기준으로 움직였을 때) 테이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 100점을 꼽았는데 이중 여성 예술가의 작품은 단 3점이었죠. 그리고 백인이 아닌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었고요.

그러니 21세기 동시대 미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통적 미술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걸 당시 테이트 모던 개관을 준비하던 멤버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2000년 오래된 화력 발전소를 리모델링한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이 개관했을 때. 커다란 발전기가 있었던 ‘터빈 홀’을 예술 작품으로 채운 미술관 건물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미술관 내부의 큐레이팅은 영국 언론의 비판을 받았는데요.

그 이유는 미술관이 예술 작품들을 ‘시간순’이나 ‘사조 순’으로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전문가들이 흔히 기대했던 순서. 인상주의 – 후기 인상주의 – 입체파 –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프랜시스 모리스의 답입니다.

“21세기 런던에 생길 미술관에는 전통적인 미술사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입체파, 추상표현주의 같은 단선적인 흐름의 미술사로는 미국, 유럽, 남성 예술가의 작품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어요.

(20세기 미술사를 기준으로 움직였을 때) 테이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 100점을 꼽았는데 이중 여성 예술가의 작품은 단 3점이었죠. 그리고 백인이 아닌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었고요.

그러니 21세기 동시대 미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통적 미술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걸 당시 테이트 모던 개관을 준비하던 멤버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2001년 테이트 모던 터빈 홀 모습. 위키피디아
모리스 관장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3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먼저 건물을 짓고, 그다음 무엇을 채우고 일할 사람을 뽑는 순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죠.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내부의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할지 또 그것을 주어진 건축물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미리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이 ‘최소 3년’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했습니다.

그럼 그 기간 동안 어떤 것을 논의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는 4개 층의 전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4개 전시장에서 4가지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었어요.

이를 전제로 준비팀이 수개월간 리서치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21세기 미술관 모델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다음 결론을 내렸죠. 전통 미술사의 사조 순서가 아니라 4개의 다른 테마를 중심으로 소장품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미술사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작품을 배치했을까?

‘테마’를 중심으로. 즉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추상화, 누드 등 작품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미술관이 다룰 수 있는 작가 풀을 넓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통 미술사를 기준으로 ‘초현실주의’를 배치한다면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놀랍게도 모두 유럽 남성 작가입니다. 이들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하고 그룹을 지어 전면에서 활동했던 작가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한 예술 작품을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루이스 부르주아, 프리다 칼로 등 여성과 남미 작가는 물론 한국의 시인 ‘이상’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현실주의를 ‘1930년대 유럽에서 나타난 미술사조’가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을 표현한 예술’이라고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리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20세기를 기준으로 ‘초현실주의’를 본다면 테이트 모던에서는 그것을 ‘초현실주의 사조’가 아니라 ‘기묘한’(uncanny) 예술 작품들이라고 그룹 짓고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1930년대가 아니라 더 넓은 시간대를 다룰 수 있게 되죠. 물론 전시장 중심에는 달리의 랍스터 전화기가 놓여있겠지만, 유럽 미술 외에 더 많은 시대와 지역의 작품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너무나 성공적인 방식이 되었어요. 최근 미술 시장에서 초현실주의가 가장 주목 받는 경향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죠.”

‘아는 만큼 보인다’ X
‘보이는 만큼 안다’ O


과거의 미술관은 특정 시기 뉴욕이 중심이 되어 썼던 미술사를 ‘맞다’고 규정하고 관객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곳이라면, 테이트 모던이 보여준 21세기 미술관은 작품을 그냥 주제별로 분류해놓고, 관객이 와서 알아서 ‘느끼라’고 열어주는 아주 개방적인 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감한스푼과 인터뷰 하고 있는 프랜시스 모리스(왼쪽) 관장. 사진제공 최희정
테이트 모던의 ‘주제’별 큐레이팅 방식은 처음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평론가들은 이 방식을 낯설고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모리스는 회고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전시 순서가 전통적인 미술사를 흩트린다고 느껴서 싫어했어요. 그런데 관객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식이었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전통적인 미술사는 1930년대 뉴욕 현대미술관장(MoMA)이었던 알프레드 바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이고, 그것을 전 세계 갤러리와 딜러들이 추종하면서 일종의 권위가 생긴 것이에요.

그런데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이 그걸 일일이 다 알고 있을까? 그걸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미술관은 특정 시기 뉴욕이 중심이 되어 썼던 미술사를 ‘맞다’고 규정하고 관객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곳이라면, 테이트 모던이 보여준 21세기 미술관은 작품을 그냥 주제별로 분류해놓고, 관객이 와서 알아서 ‘느끼라’고 열어주는 아주 개방적인 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술관이 권위를 내려놓는 것은 아주 겸손한 태도이면서도, 미술관을 찾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에게 ‘관객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가졌냐’고 물었습니다.

프랜시스 모리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프랜시스 모리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정말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스스로 예술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지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미술관이 제공한 최소한의 기준은 모든 사람이 가장 익숙할 ‘주제’. 그러니까 풍경, 누드, 정물 같은 것들이었죠.”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게 아니라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야~’, ‘이건 다다야~’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삶과 시대에서 어떤 맥락으로 무슨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했는지 그 풍부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작품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재밌는 것은 이러한 방식이 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공식과 정반대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서 ‘안다’는 것이 전통 미술사라는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말이죠.

오히려 그런 정보에서 벗어나 작품의 시각 언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그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오래전부터 느껴오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게 아니라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야~’, ‘이건 다다야~’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삶과 시대에서 어떤 맥락으로 무슨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했는지 그 풍부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작품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읽는 데에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시를 읽을 때처럼 지식은 물론 감각을 동원해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는, 감각과 지성이 합쳐진 ‘감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해석에는 정답이 없고, 다만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 나름의 논리가 있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공명’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미술관의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 그 이후 세상이 펼쳐지는 양상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만큼 안다’의 방식은 테이트 모던뿐 아니라 최근 개관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권위 있는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물론 올해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스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전시 방식은 단순히 방법론적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상적 뿌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 주 뉴스레터에서 이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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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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