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틀임하는 섬 길을 걷는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30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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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연화도 용머리바위 사이에 놓여 있는 출렁다리. ‘용의 비늘’ 모양으로 비쭉비쭉 솟은 바위 사이 협곡에 있어 밑에서 올려다보면 아찔한 느낌을 준다.
경남 통영 연화도 용머리바위 사이에 놓여 있는 출렁다리. ‘용의 비늘’ 모양으로 비쭉비쭉 솟은 바위 사이 협곡에 있어 밑에서 올려다보면 아찔한 느낌을 준다.
섬은 기본적으로 산이다. 정확히는 물에 빠진 산이다. 그래서 섬 길은 가파르다.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둘레길을 걷다가 능선에 오르면 전망이 기가 막히다. 윤슬이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 해안 절벽으로 유명한 경남 통영 연화도(蓮花島)와 추도는 섬 트레킹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푸른 용의 해 갑진년, 용틀임하는 섬 트레킹으로 봄 여행을 시작해보자.

● 용이 꿈틀대는 연화도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경남 통영여객선터미널 앞 서호시장에서 시락국(시래깃국)을 먹는다. 장어 뼈를 푹 고아서 만든 국물에 시래기를 넣고 끓인 후 제피(초피)가루, 청양고추를 넣어서 먹는 통영 별미다. 시락국으로 아침을 먹고 나니 해장이 되면서 힘이 난다. 오전 6시 반 연화도-욕지도행 배를 타니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른다.

통영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져 있는 연화도에 1시간 만에 도착한다. 먼바다에서 바라보면 연꽃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연화도는 여름에 섬 전체에 피어나는 수국으로 유명한 섬이다. 연화포구에 내려서 마을을 걷다 보면 전교생이 달랑 2명뿐인 원량초등학교 연화분교를 만난다. 학교 옆에는 연화사가 있고, 더 올라가면 해안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보덕암이 있다.

연화도 보덕암에서 바라본 해수관음상과 용머리해안. 용이 대양을 향해 헤엄쳐 나가듯 봉우리들이 꿈틀댄다.
연화도 보덕암에서 바라본 해수관음상과 용머리해안. 용이 대양을 향해 헤엄쳐 나가듯 봉우리들이 꿈틀댄다.
바닷가에 있는 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보덕암도 관음성지(觀音聖地)다. 연화도 용머리 해안이 바라보이는 절경에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하는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 인천 강화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경남 남해 보리암 등 바닷가에 있는 절에는 해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이 원래 남(南)인도 바닷가에 있는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보덕암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에는 동백꽃이 통째로 떨어져 붉은 주단 길을 만들었다.

연화도 트레킹은 최고봉인 연화봉(212m)에서 시작한다. 연화봉에서는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타고 동쪽에 있는 동두마을로 걸어간다. 연화도 동쪽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해식애(海蝕崖·해안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낭떠러지)인 용머리바위 연봉 위를 걷는 길이다. 이 길은 ‘통영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천하절경이다. 삐죽삐죽 솟은 봉우리들은 용이 대양을 향해 헤엄쳐 나가는 모습처럼 꿈틀댄다. 섬 일주(一周) 관광버스 기사님 해설에 따르면 봉우리들은 용 목 부분 위에 튀어나온 ‘용의 비늘’이며, 용머리는 바닷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 용이 바다 위로 머리를 들어 올리는 날, 저 바위들이 솟구치면서 파도를 뚫고 하늘로 날아가리라.

용머리 해안 트레킹 중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서호시장에서 사온 충무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노지(露地)에서 피어난 야생 갓이 자라고 있었다. 갓잎을 따다가 맛을 보니 알싸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입맛을 돋우는 봄의 맛이다.

연화도 동백꽃이 통째로 떨어져 주단 길을 만들어냈다.
연화도 동백꽃이 통째로 떨어져 주단 길을 만들어냈다.
용머리 해안으로 향하는 트레킹 코스에는 곳곳에 기암절벽과 해송, 동백 숲이 어우러진다. 근육질 바위들이 해안을 감싸고, 북한산 사모바위 같은 네모난 돌이 절벽 꼭대기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용머리 해안 끝에 동두마을이 있다. 둥근 해안선에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데, 그 위 네모난 양식장들이 도형미를 선사한다. 용머리 연봉을 이어주는 잘록한 협곡 사이에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하늘 위를 걷는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용머리 바위 길에서 다시 돌아와 동두마을 해변으로 내려온다. 해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수요응답형 마을버스’에 전화를 건다. 1000원을 내니 마을버스 운전사가 연화도 항구로 다시 데려다 준다. 이 운전사는 가파른 산길을 능숙한 솜씨로 드라이브하면서 섬 곳곳을 설명해준다. “여름에 수국 꽃이 필 때 섬에 한 번 더 오이소.”

● ‘섬 영화제’ 열리는 추도

통영 앞바다 한려수도에는 수많은 섬이 있다. 통영항 주변에 숙소를 정해 놓고 매일 아침에 섬 한 곳씩 다녀오는 트레킹 여행객도 있다.

통영항에서 남서쪽으로 14.5km 해상에 있는 추도는 관광객이 북적대는 섬이 아니라 주민들만 살고 있기 때문에 호젓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걸어서 2시간 정도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추도에는 미조, 대항 두 항구 마을에 주민 70∼80명이 살고 있다.

미조항 마을에는 통영 명물 ‘추도 후박나무’가 있다. 198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추도 후박나무는 높이 10m, 가슴 높이 줄기 둘레가 3.67m에 이른다. 수령 500년가량의 이 나무는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동서 15m, 남북 14m에 이르며 넓은 그늘을 만들어낸다.

미조항에서 출발해서 섬을 일주하는 길을 걷는다. 도로 주변에 있는 키 큰 소나무에 덩굴이 늘어지며 밀림처럼 우거져 있다. 용두암 근처 바다에서 거북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배를 타고 미역을 따는 어르신 모습이 봄을 느끼게 했다.

추도 해안 샛갯끝에서 내려다본 바다 윤슬과 낚싯배가 만든 물거품이 장관을 이룬다.
추도 해안 샛갯끝에서 내려다본 바다 윤슬과 낚싯배가 만든 물거품이 장관을 이룬다.
대항마을 방향으로 좀 더 걸어가니 추도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꼽히는 샛갯끝이 나온다. 샛개란 ‘사이에 있는 바다’라는 뜻. 샛갯끝은 해안으로 삐죽하게 600m가량 튀어나온 곶이다. 솔잎 쌓인 오솔길에는 빠알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있다. 샛갯끝은 연화도 용머리해안을 걷는 것과 비슷한 해안 절벽 절경을 보여준다. 바위 옆으로 바라보이는 바닷가 물결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이다. 낚싯배가 미끄러지듯 달려오면서 물거품 자국으로 원호를 그린다.

샛갯끝 앞에는 ‘개와 늑대의 시간’ ‘라스트 필름’ 등을 찍은 영화감독 전수일(경성대 교수)의 집이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펜션에는 ‘추도 컬처클럽 리조트’란 간판이 걸려 있다. 전수일 감독은 “4년쯤 전 추도에 처음 와서 한적함과 조용함에 반해 추도에 눌러살게 됐다”고 말했다. 전 감독은 “다른 섬처럼 관광지로 개발이 되지 않고 조용한 것이 추도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5월 ‘섬 영화제’가 열리는 추도 컬처 클럽 야외 극장.
5월 ‘섬 영화제’가 열리는 추도 컬처 클럽 야외 극장.
펜션 앞마당에는 지중해처럼 시퍼런 바닷물을 배경으로 원형 무대가 설치돼 있다. 약 100명까지 앉을 수 있는 객석 앞에서 음악회나 콘서트, 시 낭송회 등이 열린다고 한다. 저녁에 스크린을 걸어놓으면 그대로 야외 영화관이 되는 이곳에서 전 감독은 지난해부터 ‘추도 섬마을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5월 17∼19일 열리는 올해 ‘추도 섬마을 영화제’의 주제는 ‘시(詩)와 섬’. 영화감독 3명이 약 1주일간 추도에 머물면서 시를 모티브로 촬영한 단편영화 3편을 상영할 예정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섬이라 그런지 항구 방파제 곳곳에는 영화 필름 모양으로 새겨진 ‘추도’ 간판과 나무조각 장식이 붙어 있다.

전 감독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배우와 감독, 게스트와 문학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시 낭송과 콘서트를 즐기는 섬 영화제는 평생 꿈꿔 오던 축제”라고 말했다.


글·사진 통영=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섬 트레킹#봄 여행#연화도#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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