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 친구’ 찰리 멍거가 말하는 삶과 투자의 지혜[딥다이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2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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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 앞엔 수십 년 동안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워런 버핏의 파트너. 찰리 멍거(Charlie Munger)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이 11월 28일 9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멍거는 부회장이란 직함을 한참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죠. 버핏은 “멍거는 건축가, 나는 종합건설업자였다”고 말합니다. 버크셔해서웨이 투자전략의 기본 틀을 설계한 장본인이 멍거라는 뜻이죠. 무뚝뚝하면서도 재치 있는 촌철살인의 명언 종합세트였던 찰리 멍거. 그의 삶과 그가 남긴 메시지들을 되짚어봅니다.

2018년의 찰리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버핏의 조수쯤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버크셔해서웨이 가치투자 전략의 창시자였다. AP뉴시스
2018년의 찰리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버핏의 조수쯤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버크셔해서웨이 가치투자 전략의 창시자였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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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로 연마한 투자기술
억만장자(포브스 기준 26억 달러) 찰리 멍거의 투자인생 초반부는 특이합니다. 그는 대학에서 기상학과 법률을 배웠을 뿐, 경제학이나 금융, 회계 수업은 들은 적 없죠.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젊은 찰리 멍거는 비교적 잘나가는 변호사였습니다. 하지만 법률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죠. “그들의 변호사가 되기보다는 우리의 부유하고 흥미로운 고객 중 한 명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변호사가 그리 큰돈은 벌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부업으로 한 주식투자와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그는 첫 100만 달러를 버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비즈니스 기술을 군대 시절 포커판에서 연마했다고 말하죠. “패가 불리할 때는 일찍 접고, 호기다 싶으면 그런 기회가 자주 오지 않으니까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기회는 옵니다. 하지만 자주 오진 않으니 왔을 때 꽉 붙잡아야 하죠.
2019년의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 버핏과 멍거는 고향이 같지만 1959년에야 처음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봤다. AP 뉴시스
2019년의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 버핏과 멍거는 고향이 같지만 1959년에야 처음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봤다. AP 뉴시스
1959년 그는 고향 오마하에서 친구의 소개로 운명의 파트너, 워런 버핏을 만나죠. 버핏이 28살, 멍거가 35살일 때입니다. 첫 만남에서 멍거가 농담하면서 바닥을 구를 듯이 웃는 모습을 보고서 버핏은 ‘저 사람은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바로 죽이 맞았고,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통화하는 사이가 됐죠. 버핏은 “우리의 생각은 너무 비슷해서 으스스하다”고 회상한 적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말다툼한 적도 없다고 하죠.

버핏에게서 자극받은 멍거는 1962년 폐쇄형 펀드인 뉴아메리카펀드 운용으로 투자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1976년 청산 전까지 이 펀드가 올린 연 평균 수익률은 23.4%. 다우지수 평균 수익률(6.4%)을 한참 웃돌았죠. 그리고 1978년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을 맡아 버핏과 한배를 탑니다.

담배꽁초 전략과의 이별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에 합류하기 전부터 웨스코 파이낸셜(Westco Financial), 씨즈 캔디(See‘s Candies) 같은 기업에 버핏과 함께 투자했는데요. 멍거의 투자 방식은 버핏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초기의 버핏은 이른바 ‘담배꽁초 투자전략’ 신봉자였죠. 멘토였던 벤저민 그레이엄이 가르쳐준 투자방식이었는데요. 버려진 담배꽁초처럼 마지막 한 모금의 가치가 남아있는 헐값의 주식을 찾아내 투자하라는 겁니다. 회사의 장부가치보다도 주가가 저평가된 싼 기업만 골라 사라는 거였죠. 버핏이 죽어가던 직물회사 버크셔해서웨이를 1962년 인수한 것도 이 때문이었고요.
버핏은 멍거의 조언을 받아들여 ‘담배꽁초 투자전략’에서 벗어나고 1972년 씨즈 캔디를 인수했다. 버핏은 “나는 찰리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면서 “만약 내가 벤 (그레이엄)의 말만 들었다면, 나는 훨씬 더 가난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씨즈 캔디 홈페이지
버핏은 멍거의 조언을 받아들여 ‘담배꽁초 투자전략’에서 벗어나고 1972년 씨즈 캔디를 인수했다. 버핏은 “나는 찰리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면서 “만약 내가 벤 (그레이엄)의 말만 들었다면, 나는 훨씬 더 가난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씨즈 캔디 홈페이지
하지만 멍거는 담배꽁초 투자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봤습니다. 그레이엄이 활약했던 1930년대 대공황 때는 건질 만한 헐값 주식이 있었겠지만, 1970년대엔 그런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고 본 거죠. 멍거는 1994년 USC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30년대는 600년 만의 최악의 경기침체였습니다. 벤 그레이엄은 1930년대 붕괴로 인한 잔해 속에서 주당 운전자본 이하로 팔리는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죠. 고전적인 벤 그레이엄 개념의 문제점은 세상이 점차 현명해지면서 그런 명백한 거래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가이거 계수기(방사선 검출기)를 잔해 위에서 작동시켜도 딸깍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시가총액이 장부가치의 2~3배여서 비싸 보이지만, 회사의 내재된 모멘텀을 봤을 때 여전히 엄청난 헐값인” 주식을 찾아내는데 몰두합니다. 그가 버핏을 설득해 연간 세전 수익이 약 4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씨즈캔드를 2500만 달러에 인수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죠. 버크셔해서웨이는 이 투자로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

버핏은 2015년 버크셔의 연례 서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멍거)가 나에게 준 청사진은 간단했습니다. 괜찮은 기업을 놀라운 가격에 인수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대신에 훌륭한 기업을 괜찮은 가격에 구매하세요.

멍거는 버핏에게 항상 “정말 멋진 기업을 사자”라고 강조했다는데요. 멍거의 설득으로 씨즈캔디 투자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후 버핏이 1988년 코카콜라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멍거를 ‘버크셔 투자접근 방식의 창시자’라고 언론이 평가하는 게 과장이 아닌 거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라
버핏이 멍거에게 붙인 별명 중 하나는 ‘가증스러운 노 맨(No Man)’입니다. 버핏이 어떤 기업에 투자하려고 할 때 툭하면 ‘노’를 외치며 막았기 때문인데요. 멍거는 늘 이렇게 강조합니다. “승리자는 거의 베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포커판에서 돈 따는 법과 비슷한데요. 1994년 연설에서 멍거는 경마 시스템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즉 가격이 잘못된 것을 찾기 위해 세상을 살펴보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하나를 찾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은 세상이 기회를 제공할 때 큰돈을 걸었습니다. 나머지 시간엔 걸지 않았고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주식도 경마 베팅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열심히 일해서 투자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 기다린다면, 아주 가끔 가격이 너무 싸게 책정된 경우를 만날 거고 그때 크게 베팅하라는 겁니다. 그는 “좋은 기회가 올 것을 대비해 1000만 달러를 통장에 넣어두는 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조언하죠.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장의 모습. 수천명이 모이는 주주총회 연단에 멍거는 버핏과 나란히 앉곤 했다. 대개 버핏이 질문에 답한 뒤 멍거에게 “추가할 말 없나?”라고 물으면 멍거는 퉁명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보탤 말 없네.” 동아일보DB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장의 모습. 수천명이 모이는 주주총회 연단에 멍거는 버핏과 나란히 앉곤 했다. 대개 버핏이 질문에 답한 뒤 멍거에게 “추가할 말 없나?”라고 물으면 멍거는 퉁명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보탤 말 없네.” 동아일보DB
투자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는 멍거는 간접투자, 특히 액티브펀드에 부정적입니다. 소수 종목만 신중하게 골라 사서 장기 보유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데, 뭐 하러 굳이 높은 수수료를 주며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는 액티브펀드에 투자하느냐는 거죠. 그는 투자운용사에 돈을 맡기는 게 어리석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낚시도구 판매원과 나눈 대화를 예로 들었죠.

“나는 그 판매원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보라색과 녹색이군요. 물고기가 정말 이런 미끼를 먹나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죠. ‘아저씨. 저는 생선을 파는 게 아닙니다.’”

투자자에게 의미 있는 것(주식으로 돈 버는 것)과 관리자에게 의미 있는 것(수수료를 버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얘기인데요. 그는 “수수료가 높은 곳은 높은 확률로 바가지를 씌운다”고도 경고한 적 있습니다. 그는 분산투자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했죠. “작금의 분산투자에 대한 숭배, 나는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는데요. 그럼에도 좋은 주식을 골라낼 역량이 없는 일반 투자자들에게는 광범위한 지수에 투자하는 인덱스펀드를 권했습니다. 지수가 하락했을 때 수수료 싼 인덱스펀드에 가입해서 은퇴할 때까지 쭉 들고 있으라는 겁니다.

재치있는 인사이트, 멍거리즘
사실 찰리 멍거를 유명하게 만든 건 그를 부자로 만든 투자법만이 아닙니다. 신랄하면서도 통찰력과 유머가 녹아있는 그의 발언들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죠. 이를 일컫는 멍거리즘(Mungerisms)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인데요.
찰리 멍거는 1980년 백내장 수술의 부작용으로 왼쪽 시력을 잃고 이후 두꺼운 안경을 썼다. 1월 1일이 생일인 그는 내년 새해 첫날에 100세 생일잔치를 열려고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DB
찰리 멍거는 1980년 백내장 수술의 부작용으로 왼쪽 시력을 잃고 이후 두꺼운 안경을 썼다. 1월 1일이 생일인 그는 내년 새해 첫날에 100세 생일잔치를 열려고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DB
워낙 명언이 많아 ‘최고의 멍거리즘’을 추리긴 어려울 정도입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인상적인 몇 가지를 뽑아보자면.

그는 끊임없는 배움을 강조했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가끔은 근면하지도 않은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이런 사람은 학습기계입니다. 그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아침보다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갈 길이 먼 사람에게 이는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지금껏 끊임없이 독서를 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명도. 워런이 얼마나 책을 읽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내가 얼마나 읽는지 알아도 마찬가지고. 우리 애들은 나를 발 달린 책이라고 놀리죠.”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죠.
“문제는 사람들이 점차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렇게 부자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또 자신의 적성과 역량을 파악하라는 조언을 남겼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고 싶다면 곧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베미지(미네소타 도시)에서 최고의 배관 시공업체가 되고 싶다면 아마 여러분 중 3분의 2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의지와 지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충분한 규율이 주어지면 달성가능한 목표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게임은 어느 정도 베미지의 훌륭한 배관 공사업자와 같은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비결을 묻는 질문엔 이런 사려 깊은 답을 들려줬습니다.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시기심과 원한이 많지 않고, 수입을 과하게 쓰지 않으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쾌활함을 유지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거래하고,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이 모든 간단한 규칙은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데 효과적입니다.”
박학다식했던 멍거는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시간 대학과 스탠퍼드대, 하버드 로스쿨에 수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자신이 건물 설계에 관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곤 했다. 2021년 그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에 2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설계한 기숙사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는데, 대부분 방에 창문이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이 ‘멍거홀’ 설립 계획은 논란 끝에 중단됐다. 동아일보DB
박학다식했던 멍거는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시간 대학과 스탠퍼드대, 하버드 로스쿨에 수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자신이 건물 설계에 관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곤 했다. 2021년 그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에 2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설계한 기숙사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는데, 대부분 방에 창문이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이 ‘멍거홀’ 설립 계획은 논란 끝에 중단됐다. 동아일보DB
그는 사람들이 투기광풍에 휩쓸린다 싶을 때면 상당히 노골적인 표현을 써가며 이를 비판했습니다. 예컨대 가상화폐를 “유독한 독”, “쥐약”으로 묘사했고요.
“(가상화폐는) 부분적으로 사기이고 부분적으로는 망상입니다. 그건 나쁜 조합입니다. 나는 사기도 망상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망상은 사기보다 더 극단적일 수 있죠.”

파생상품은 도박에 비유했습니다.
“파생상품을 지능적으로 거래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훔칠 수 있는 면허증을 가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두가 모두와 도박을 하면 대체 무슨 이득이 있나요?”

올해 99세였던 찰리 멍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 유수의 언론들과 연이어 인터뷰했는데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사망 뒤에 나온 인터뷰 기사 중 최고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사가 아닐까 싶은데요. 멍거를 20년 동안 취재해온 제이슨 츠바이크 기자는 그에게 “10단어 이하의 비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각 이렇게 답했죠. “나는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I tried to be useful).” 실제 자신이 유용했는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할 일이라는 겸손함. 억만장자 투자자 찰리 멍거가 돈 말고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일 겁니다. By.딥다이브

찰리 멍거는 워낙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일과 발언을 남긴 인물이라 기사 하나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네요. 주요 외신 기사(NY, FT, WSJ, CNBC, 블룸버그)와 함께 그의 전기 ‘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Charlie Munger Damn Right)’과 그의 발언을 모은 책 ‘찰리 멍거의 말들(The tao of Charlie Munger)’, 그리고 그가 1994년 USC 경영대학원에서 한 ‘초보적인 세상 지혜에 대한 교훈’ 강연 내용을 주로 참조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변호사였던 찰리 멍거는 그의 나이 35살에 운명처럼 워런 버핏을 만났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투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만의 가치투자 철학을 구축해갑니다.

-버핏이 ‘담배꽁초 투자법’을 버리고 ‘훌륭한 기업을 괜찮은 가격에’ 사들이게 된 것 역시 멍거의 조언 덕분이었습니다. 버크셔해서웨이 투자방식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가 말하는 성공적인 투자법은 간단합니다. 현금을 들고 기다렸다가 정말 좋은 기회가 왔을 때 크게 베팅하는 거죠.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역량 범위를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죠. 억만장자 투자 천재로 불리는 그는 성공의 많은 부분은 행운 덕분이고, 자신은 그저 노력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죽을 때까지 지켰습니다.

*이 기사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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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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