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요금 20배 뛴다? 경제 파탄 아르헨티나의 반전 대선[딥다이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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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연 138%, 빈곤율은 40%에 달하고 중앙은행 금고는 텅 비었습니다.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짐작하시겠죠? 아르헨티나입니다.

경제가 위태로운 아르헨티나 대선이 전 세계 관심을 끄는 가운데 22일 1차 투표가 진행됐는데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현 경제부 장관 세르히오 마사 후보가 선두를 차지했죠. 나라 경제를 붕괴시키고도 끄떡없는 페론주의의 힘이 놀라운데요. 11월 19일 ‘무정부 자유주의자’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와 결선투표를 진행합니다. 아르헨티나 경제와 대선 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22일 대선 1차 투표 직후 세르히오 마사 후보 지지자들이 그의 유니폼을 받기 위해 손을 뻗치고 있다. 현직 경제부 장관인 마사 후보는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37%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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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파란달러 환율과 물가
‘10월 22일 블루달러 가격은 1달러당 1150페소입니다. 한 달 전보다 55%, 1년 전보다 301% 상승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최대 신문사 클라린은 매일 그날의 블루달러 환율을 주요 뉴스로 전합니다. 블루달러란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달러이죠. 참고로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은 1달러당 350페소입니다. 은행에선 1달러를 350페소에 살 수 있는데, 암시장에선 그 세배에 가까운 1150페소를 줘야 하다니. 그럼 은행에 가면 되지 않나 하실 텐데요. 달러가 부족한 아르헨티나 정부가 환전량을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가도 살 수 없습니다. 블루달러 환율이 시장 표준이 된 이유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정부가 정한 비공식 환율 종류만 12개에 달합니다. 주식거래용 환율이 따로 있는가 하면(1달러에 약 900페소), 대두 수출용 환율, 카타르 환율(자국민이 카타르 월드컵 티켓처럼 해외구매를 할 때 적용하는 환율), 콜드플레이 환율(해외 가수 초청 시 적용하는 환율) 등이 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아르헨티나 정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외환유출을 막으려다 보니 환율이 누더기가 된 겁니다.
10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가게가 1달러는 950페소라고 써붙여놨다. 대선을 앞두고 블루달러 환율은 계속 치솟아 22일엔 1150페소를 기록했다. AP 뉴시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외환부족 문제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외화보유액은 240억 달러인데요. 대부분 중국 인민은행과 맺은 위안화 스와프(180억 달러)인 데다, 민간부문 외화예금 준비금처럼 뺄 수 없는 돈을 제외하면 실제 꺼내 쓸 수 있는 순외환보유액은 마이너스(-) 77억 달러입니다. 말 그대로 금고가 텅 비다 못해 적자입니다. 60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으로 주요 수출품인 옥수수와 콩 생산량이 올해 반토막 난 영향이 큽니다. 가뜩이나 경제난이 심각한 와중에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는데요.

공산품 대부분을 수입하는 아르헨티나이다 보니 인플레이션이 엄청납니다. 9월엔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38.3%를 기록했는데요. JP모건은 올해 연말이면 연간 인플레이션이 210%까지 치솟을 거라고 경고했죠.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계속 올려, 기준금리가 무려 133%에 달합니다. 현금 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올해 2000페소짜리 고액권 지폐를 새로 발행했는데요. 지금 블루달러 환율로는 그 가치가 2달러도 안 되는 겁니다.

이 정도는 초인플레이션 축에도 못 낀다
아르헨티나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거야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죠. 사실 아르헨티나가 세계적 부국이었던 전성기(1900년대 초~1940년대 초반)를 제외하면, 그 이후엔 인플레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최근 25년간 아르헨티나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최근 인플레이션이 엄청나 보이지만, 기간을 더 늘려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까지의 엄청난 초인플레이션 당시와 비교하면 훨씬 덜한 수준이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특히 1980년대 말엔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한 해 물가상승률이 1989년 3083%, 1990년은 2370%이었죠. 특히 1990년 3월 기준으로는 무려 2만% 넘는 연간 상승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그때의 기록이 강렬해서 아르헨티나에선 지금 단계(연간 138% 상승)를 ‘초인플레이션(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진 않을 정도입니다.

30여 년 전의 이런 초인플레이션을 잡은 게 뭔지 아시나요. 바로 달러입니다. 1991년 정부는 화폐개혁과 함께 ‘1달러-1페소’ 페그제를 도입했죠. 1페소를 1달러로 교환하는 걸 중앙은행이 보증해주기로 한 건데요. 이 대담한 경제정책은 바로 마법 같은 효과를 냅니다. 일단 인플레이션이 1991년 7.7%로 뚝 떨어졌죠. 경제도 다시 성장세를 회복했고요.

하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었습니다. 1999년 브라질이 헤알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달러화가 강세를 띠자 아르헨티나의 수출이 급감했습니다. 페그제에 묶여있다 보니 통화가치를 떨어뜨리지 못한 탓이 컸죠. 게다가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외채 발행을 엄청 늘렸는데, 신흥시장 위기가 터지면서 외국 자금이 무섭게 빠져나갔습니다. 결국 2001년 모라토리엄 선언, 2002년 페그제 폐지로 이어졌죠.

달러화 공약이 불러온 금융시장 대혼란
그럼에도 30년 전의 강렬한 기억 때문일까요.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에선 ‘달러화’를 공약으로 내건 급진파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가 초반에 돌풍을 일으킵니다. 달러화(Dollarization)란 1대 1 페그제 정도가 아니라 ‘쓰레기(밀레이의 표현)’인 페소를 아예 없애고 미국 달러를 유일의 법정통화로 만들자는 주장입니다. 2000년 미국 달러를 공식통화로 채택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잡은 에콰도르처럼 말이죠.
경제학자로 TV 해설가 출신인 밀레이는 과격한 언사와 파격적인 주장으로 흔히 아르헨티나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린다. 다만 그는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트럼프 같은 민족주의적 성향은 보이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동아일보DB
밀레이 후보는 달러화를 포함한 ‘무정부적 자본주의’ 정책으로 젊은층을 사로잡았는데요. 특히 불필요한 정부기관과 방만한 재정을 잘라내 버리겠다며 전기톱 퍼포먼스를 벌이며 강렬한 이미지를 심었죠. 구체적으로는 국영산업을 민영화하고 18개 연방부처 중 10개를 폐쇄하고, GDP의 15%만큼 연방지출을 삭감한다는 게 그의 공약입니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그는 올해 8월 예비선거에서 1위를 차지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만큼 기존 정치인에 신물 난 유권자들이 과격하고 새로운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겁니다.

과연 그가 말하는 ‘달러화’가 정말 가능한가(아르헨티나가 어디서 달러를 구하지?), 맞는 방향인가(통화정책 주권을 미국 연준에 넘긴다고?)라는 논란이 전 세계적으로 일었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달러화를 한 국가 중 가장 경제규모가 큰 에콰도르 GDP와 비교하면 5배 수준이거든요. 진짜 달러화가 된다면 세계 경제사에 기록될 큰 사건입니다.

대부분 경제학계가 달러화 공약에 회의적인 가운데, 지난 두달 동안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은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페소화가 진짜 쓰레기가 될 수 있단 걱정이 고조되면서 너도나도 달러를 사두려고 한 겁니다. 밀레이 후보는 “페소 정기예금을 갱신하지 말라”면서 이를 부추겼고요. 8월 예비선거 직전엔 블루달러 환율이 1달러에 660페소 정도였는데요. 1차 대선이 앞둔 이달 들어선 1000페소를 돌파했습니다. 대혼란이 아닐 수 없죠. 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였던 알폰소 프라트 게이는 이게 다 밀레이의 작전이라고 봅니다. “밀레이는 완전한 붕괴 없이는 통치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죠.

분노 투표 누른 공포 투표
그런데 22일 대선 1차 투표 결과를 열어보니 또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현 정부의 경제부 장관이자 예비선거에서 3위에 머물렀던 집권당 마사 후보가 꽤 큰 차이(득표율 37%)로 1위에 오른 겁니다. 밀레이 후보는 30%로 2위이고요.

국가 경제가 이 모양인데 집권당에 표를 몰아주다니. 도대체 이런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밀레이 후보의 호전적인 선동(예-‘교황은 똥덩어리다’)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건 작은 이유입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죠. 선거일 며칠 전 아르헨티나의 철도노조가 기차역에 띄운 이 홍보물 사진을 보시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아르헨티나 철도노조가 기차역에 띄운 홍보물.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 열차요금이 지금의 20배 수준으로 치솟을 거란 내용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각종 보조금이 철폐되면 전기, 수도, 교통요금이 일제히 뛰어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이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마사 후보가 당선되면 열차표 값은 지금처럼 56.23페소이지만, 밀레이 후보가 당선되면 1100페소가 될 거란 내용의 선전물입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전기∙수도∙대중교통 등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 중이죠. 철도노조는 친시장적인 밀레이가 당선되면 철도 민영화와 함께 보조금도 폐지할 거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일종의 공포 조장 선거운동인데요. 놀랍지 않게도 이게 꽤 잘 통했습니다. ‘공포투표’가 ‘분노투표’를 압도한 겁니다.

8월 예비선거에서 크게 뒤진 뒤 집권당은 달콤한 조치들을 연이어 내놨습니다. 언론에서 ‘플랜 플라티타(Plan Platita; 소액자금 계획)’로 부르는 일련의 퍼주기식 경제정책들인데요. 식료품 부가가치세 21%를 환급해주고, 수백만 명 근로자(최상위층 포함)에 소득세를 깎아주고, 연금수급자에게 100달러 어치(공식환율 기준)의 페소 보너스를 지급해줬습니다. 농산물 수출세도 깎아줬고요. 동시에 “증세는 없다”면서 유권자들을 다독였죠.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런 마사의 행보를 두고 ‘통제불능의 산타클로스’라고 꼬집습니다.
아르헨티나 여당 대선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현 경제부 장관이 1차 투표 승리 뒤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그는 밀레이 후보와 11월 19일 결선투표에서 맞붙는다. AP 뉴시스
도대체 재정이 바닥난 정부가 무슨 돈으로 이렇게 퍼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페소화를 마구 찍어내겠죠. 자칫 인플레이션만 더 자극할 위험이 있는데요. 아르헨티나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일부 증세를 약속했던 터라, 이런 정책들이 나온 게 더 놀랍습니다. 알레한드로 베르너 전 IMF 국장은 “IMF에서 9년 동안 일하면서 본 적 없는 수준의 냉소주의와 무책임함”이라고 비판합니다.

아르헨티나는 국민 5명 중 2명이 빈곤층입니다. 상반기 40%를 돌파한 빈곤율은 올 연말엔 42%로 높아질 전망이죠.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장 손에 돈을 더 쥐여주는 조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마사 후보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두 달 만에 역전에 성공했으니까요.

이번 결과를 두고 ‘페론주의의 부활’이라며 전 세계가 놀라워합니다. ‘온건파 실용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마사 후보가 망해가던 페론주의를 간신히 구했다는 평가입니다. 윌슨 센터의 이코노미스트 아르투로 포르제칸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속 가능하지 않더라도 모든 효과를 포용하는 페론주의 지도자의 카멜레온 같은 능력”이 힘을 발휘한 겁니다.

결국 아르헨티나 대선은 좌파 페론주의 후보와 급진적 시장주의 후보의 대결로 압축됐습니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가장 양극화된 시나리오이자 채권시장 투자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이다.” 앞으로 결선투표까지 4주 동안 불확실성이 극대화되면서 시장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인데요.

현금살포 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본 집권당이 이런 정책을 더 내놓을 거란 점도 걱정입니다. JP모건은 이날 메모에서 “11월 19일 결선까지 정부는 계속해서 토끼를 모자에서 꺼내려고 할 것”이라며 “대선 이후 시정해야 할 불균형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죠. 누가 당선되든, 새 대통령이 취임할 12월 10일엔 지금보다 더 나빠진 경제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By.딥다이브

아르헨티나 대선 1차 투표 결과는 완전히 반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전문가가 여당 후보가 1위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공포심 조장+현금 쥐어주기 전략이 통했다는 분석이 이어집니다. 동시에 두 후보 중 누가 당선 되더라도 경제는 걱정이라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치솟는 물가와 급락한 통화가치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가뭄까지 겹친 탓에 수출은 급감하고 빈곤층은 급증합니다. 이번 대선이 주목 받는 이유입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밀레이 후보가 ‘달러화’를 공약하며 젊은층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금융시장은 대혼란에 빠졌고 암시장 환율은 무섭게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1차 투표에선 집권당 마사 후보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보조금 없애면 큰일난다’는 공포 조장이 잘 먹혔는데요. 세금 환급해주고, 현금 보조금 쥐여주는 퍼주기식 정책도 한몫 했습니다.

-페론주의와 급진주의자의 대결로 압축됐는데요. 남은 4주 동안 불확실성은 더 고조될 수도.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이 기사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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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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