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인간 무너뜨리는 ‘세뇌’의 작동법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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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의 심리학/요스트 A.M. 메이를로 지음·신기원 옮김/392쪽·1만8900원·에코리브르

6·25전쟁 때 중국 공산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 해군 대령 프랭크 H 슈와블은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내용이 담긴 자백 문건에 서명했다. 이 문건에는 책임자의 이름, 전략 회의, 작전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재돼 있었다. 이 문건은 곧바로 선전에 이용됐다. 본국으로 송환된 후 군사법정에 서게 된 슈와블 대령은 자백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은 내 것이지만, 생각은 적들의 것이었다. 거짓을 어떻게 내 입으로 사실처럼 말했는가. 나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슈와블 대령은 어떻게 생각을 지배당하고 거짓 자백까지 하게 된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나치의 폭력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이다. 1903년 태어난 저자는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에서 그들의 정신적 고문 기술을 목격했다. 1942년 영국으로 탈출한 그는 연합군의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더 많은 피해자들을 만났다. 이 경험을 확장해 어떻게 사회 속에서 세뇌가 작용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책에 담았다.

통념과는 달리 신체적 고문보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등 정신적 고문이 더 치명적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동물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고문하는 사람도 존엄을 잃는다. 이를 저자는 ‘정신적 살해(menticide)’라고 말한다.

평소에는 통제했던 갈등이 ‘정신적 살해’의 압박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따라서 세뇌를 이기려면 평소 내면의 작은 갈등도 스스로 극복하려는 ‘생각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삶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신념을 평소에도 단단히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1956년 출간된 책이지만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중매체가 사람들로부터 주체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지적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세뇌의 심리학#세뇌의 작동법#생각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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