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형준]日 가상자산 사업가가 싱가포르로 간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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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 보호 넘어 산업진흥 나서는 日
韓, 아직 투자자 보호 법률 만드는 중

박형준 경제부장
박형준 경제부장
‘Japan as No. 1 AGAIN.’

지난해 9월 26일 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이 같은 영문 광고가 실렸다. 이미지는 없었다. 일본을 다시 넘버원으로 만들자는 뜻의 영문이 가운데 큼지막하게 자리했고, 그 주변에 329개사 로고가 있었다. 가상자산 벤처기업도 여럿 포함됐다. 블록체인을 연결시킨 플랫폼을 만들어 기존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체계를 바꾸겠다는 설명도 달려 있었다.

광고주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트업 ‘스테이크테크놀로지’다. 27세인 창업자 와타나베 소타(渡邊創太) 씨는 애초 일본에서 사업하려 했다. 하지만 규제와 세금이 너무 엄격해 2020년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는 ‘가상자산에 리스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리스크를 겁내는 게 국가에 더 손해다. 우리는 가상자산 시장을 진흥시킬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세금을 더 내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은 가상자산 사업을 하기 쉽지 않은 국가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자금결제법을 개정해 가상자산을 화폐에 준하는 지급수단으로 보고 규제하기 시작했다. 거래소는 의무적으로 금융청에 등록해야 하고, 고객 자산을 별도로 관리해야 했다. 세금도 무겁다. 가상자산 매매로 얻은 이익은 주식 매매와 달리 분리과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존 소득과 합산해 과세하기 때문에 최대 55% 세율로 세금이 매겨진다. 가상자산을 다른 가상자산으로 교환할 때마다 세금을 내야 한다.

반면 투자자라면 일본만 한 곳도 드물다. 지난해 11월 미국 FTX 파산 때 미국에선 투자자들이 자산을 인출할 수 없어 패닉에 빠졌지만, 일본에선 그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FTX 일본 법인은 금융청 규제로 투자자가 맡긴 자금을 은행 등에 의무적으로 맡긴 덕분이었다.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인 일본에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금융당국이 최소 6개월이 걸리는 가상자산 상장 심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고 지난해 10월 밝혔다. 또 한 거래소에 상장된 가상자산을 다른 거래소에서 거래되게끔 할 때 신규 상장 절차를 거쳐야 하는 기존 제도도 없애겠다고 했다. 일본이 이제 가상자산 산업 진흥에도 나서는 모습이다.

한국은 어떨까. 가상자산 관련법은 2020년에 개정된 특정금융정보거래법이 유일하다. 이 법은 주로 가상자산 사업자의 진입 규제에 대한 것으로 투자자 보호에는 미흡하다. 투자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안 19개는 모두 국회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FTX 사태, 테라-루나 폭락을 계기로 국회에서 법안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도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없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과 금융당국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와 산업 진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답은 예외 없이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한 금융 당국 인사는 “규제 당국에 왜 산업 진흥 이야기를 하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모든 부처의 ‘산업부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등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적어도 가상자산 업계에선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일본은 다시 세계 1위가 되겠다며 조용히 산업 진흥에 나서고 있다. 와타나베 씨가 일본으로 유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이면 한국에 지사를 세울 일은 분명 없을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가상자산 사업가#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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