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겨울’ 이겨낸 스타트업 “자금절약-투명공개로 신뢰 얻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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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금 낭비 않는다는 인상 주고 매달 보고서 작성해 신뢰 얻어
마케팅보다 ‘기술’ 제대로 알려야… 지속 성장에 수익성도 중요 요건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자금난을 겪는 스타트업이 늘고 있지만 몇몇 스타트업은 유동성이 풍부했던 시기 못지않은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들이 투자를 받은 비결은 뭘까.

동아일보는 최근 ‘주목할 만한’ 투자를 유치한 △리벨리온 △서울로보틱스 △케어링 △마크비전 △고피자 등 스타트업 5곳의 대표들을 만났다. 이들은 경쟁력 있는 기술이나 서비스 개발은 기본이고 낭비하지 않는 겸허함, 상용화, 미래산업, 매출의 예측 가능성 등을 높게 평가받아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고 했다.
○ “겸허함은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비결”
사진=안철민, 김동주, 전영한 기자
사진=안철민, 김동주, 전영한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39)가 투자 유치 비결 중 하나로 꼽은 것은 ‘겸허함(Stay humble)’이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7월 920억 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 박 대표는 “실사를 까다롭게 하기로 소문난 글로벌 투자사 테마섹이 이번 투자에 합류했다”며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둔 다른 스타트업과 달리 임차료가 절반가량인 성남시 정자역 인근 주상복합 건물에 들어서 있다는 점이 ‘이 기업에 투자하면 돈을 적재적소에 쓸 것 같다’는 인상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 운영도 ‘험블’하게 하고 있다. 한때 스타트업 사이에서 유행했던 200만 원짜리 ‘허먼밀러’ 의자는커녕 사무실 가구는 모두 중고로 구입했고 법인차량도 없다. 박 대표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대형 회계법인 출신의 회계사 두 명을 둬서 ‘돈이 새지 않도록’ 회계를 전문적으로 관리한다.

그렇다고 직원 처우가 열악한 것은 아니다.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 낭비하지 않을 뿐이다. 사무실 한쪽에는 여러 개의 수면실과 샤워실을 마련했고, 직원들이 점심식사 고민을 하지 않도록 평일에는 사무실로 식사를 배달한다. 고사양 컴퓨터 등 업무에 필요한 도구나 장비는 기꺼이 구입한다. 박 대표는 “업무시간 중에 필라테스나 영어회화 강사를 부른다거나, 직원들의 독서모임을 장려하는 등의 사원 복지는 업무 몰입을 방해하고 회사 분위기를 흐리는 것 같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푸드테크 스타트업 ‘고피자’는 지난해 10월 250억 원 규모의 시리즈 C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뿐 아니라 인도 싱가포르 홍콩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도 가파르게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 기업이다.

이 회사 임재원 대표(34)가 말하는 투자 유치의 비결은 ‘월간 리포트’를 통해 얻은 신뢰다. 그는 매달 13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4년간 투자자들에게 보냈다. 보고서에는 매달 잘한 것뿐 아니라 못한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투명하게 담았다.

그는 “못한 것에 대해 쓸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이를 공개하고 개선 사항이나 계획을 밝힌 것이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 투자자들이 투자를 이끌면 다음 투자 라운드에서 투자 유치가 좀 더 수월해지는데, 1년에 두세 번 투자자들을 만나는 것과 매달 보고를 하는 것은 투자자들과 신뢰를 형성하는 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궁상맞을 정도로 돈을 아껴 써 왔다”고 했다. 그는 “매출은 한 달에 25억 원씩 나오고 있는 반면 한 달에 쓰는 금액은 1억∼2억 원으로 매출 대비 적은 편이라는 점이 투자 유치에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 “번드레한 말보다는 가능성을 실현화해야”
사진=안철민, 김동주, 전영한 기자
사진=안철민, 김동주, 전영한 기자
시장에서 통하는 걸 보여주는 것 역시 투자 유치의 주된 요소다. 인프라 기반 자율주행 스타트업 ‘서울로보틱스’의 이한빈 대표(32)는 “지난해 7월 BMW 7시리즈 공장에서 (운용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절대 투자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로보틱스는 눈과 비 등 악천후에서도 자율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차별화된 기술력을 갖췄지만 투자 시장이 나빠지면서 투자 유치가 예상보다 지연됐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는 3개월간 개인 자금과 대출을 통해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할 정도로 고생했다. 하지만 BMW 7시리즈 공장에서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 긍정적인 시그널로 작용하면서 상용화 두 달 만인 지난해 9월 308억 원 규모의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했다.

지난해 8월 300억 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한 실버테크 스타트업 ‘케어링’은 2만7000여 명의 요양보호사를 직접 관리하며 전국의 어르신 6000여 명에게 방문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다. 이 회사 김태성 대표(35)가 든 투자 유치 비결은 확정된 미래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한국의 인구구조를 보면 초고령사회는 확정된 미래이고, 그만큼 실버테크는 추상적인 비즈니스가 아니라 확실한 미래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260억 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한 AI 스타트업 ‘마크비전’은 사업의 예측 가능성을 투자 유치 성공 비결 중 하나로 꼽았다. 마크비전은 온라인상의 위조 상품 및 불법 콘텐츠를 모니터링하고 제거하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를 기업 100여 곳에 제공하고 있다.

이 회사 이인섭 대표(33)가 꼽은 투자 성공 유치 비결 중 하나는 SaaS 특유의 ‘구독 모델에 따른 매출의 예측 가능성’이다. 이 대표는 “매달 구독료를 기업으로부터 받는 만큼 고객이 이탈하지 않는 이상 현금 흐름을 예측하기 쉽다”며 “글로벌 브랜드들의 이용이 늘고 있는 점도 투자회사들이 긍정적으로 봤다”고 말했다.

벤처투자 업계는 최근 상황에서 ‘수익성’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됐다고 꼽는다.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마케팅비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이나 6개월, 1년에 한 번씩 펀딩을 받으면서 성장성을 보여줬던 곳들에 대한 투자는 지양될 것”이라며 “성장을 바탕으로 적정한 수익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이 투자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단계
벤처캐피털(VC)로부터 투자유치 순서에 따라 시리즈 A, B, C, D, E 등으로 부른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관행을 국내로 가져왔다. 시리즈 A, B는 비즈니스 모델이 검증돼 어느 정도 서비스나 수익 모델 지표를 보여주고 본격적인 성장을 앞둔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다. 시리즈 C 이상의 단계는 본격적인 성장을 이루고 성공궤도에 진입한 스타트업, 혹은 상장이나 대형 M&A가 가능한 기업이 대상이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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