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대 모니터 명멸은 ‘깨어있으라’는 백남준의 죽비[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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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중단 4년 7개월 만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9월부터 재공개된 백남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다다익선’. 총 
1003대에 달하는 노후된 모니터 가운데 737대는 수리를, 266대는 교체하는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 중단 4년 7개월 만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9월부터 재공개된 백남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다다익선’. 총 1003대에 달하는 노후된 모니터 가운데 737대는 수리를, 266대는 교체하는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2022년 9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에서, 아니 세계 비디오 아트의 역사에서, 기록적인 날이다. 과천관의 상징과 같았던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이 재가동되었기 때문이다. 4년 이상을 암흑 속에 있다가 어렵게 불을 켠 날, 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18년 2월 ‘다다익선’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작동 금지를 당했다. 재가동을 위한 논의만 무성했다. 그러는 사이에 1년이 훌쩍 흘러갔다. 내가 미술관에 취임하니 크게 3가지의 견해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원형 보존, 신기술 교체, 철거. 사실 이 같은 3가지 주장은 다 가능한 일이었다. 원형 보존은 ‘다다익선’에서 사용했던 브라운관(CRT) 모니터의 단종이라는 한계와 만나고 있었다. TV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다다익선’ 당시의 모니터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게 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은 신기술을 도입해 항구적 체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백남준 역시 기계는 수명이 있는 것이니 새로운 기술로 대체해도 좋다는 신축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원형 보존이고 신기술이고 따질 것이 아니라 아예 철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다다익선’은 미술관 소장 작품이 아니었다. 하나의 시설물, 바로 미술관 시설물에 불과했다. 시설물은 용도를 다하면 폐기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미술관의 중요 공간을 한 작가로 하여금 영구 독점하게 하는 방식은 문제라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이에 나는 학술대회를 비롯해 전문가 자문회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모았다. 드디어 결론을 얻었다. 원형 보존! 철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다다익선’을 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등록하고 원형 보존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보존·복원을 위한 특별 조치를 거쳐야 했다. 보존 원칙은 작품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되 그럴 수 없는 경우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기술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다익선’ 상층부의 작은 모니터는 액정표시장치(LCD) 등 새 기술로 바꾸었다. 1003대의 모니터, 그러니까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설치된 ‘다다익선’은 30여 년 동안 매일 8시간씩 각광을 받다가 이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구형 CRT 모니터 1003대 가운데 737대는 수리를 했고, 266대는 교체했다. 구형 모니터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외 중고품 시장을 섭렵해야 했다.

복원 작업 중인 ‘다다익선’의 모습. 한때 철거론까지 대두됐지만 모습을 원형 그대로 교체, 수리해 보존하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복원 작업 중인 ‘다다익선’의 모습. 한때 철거론까지 대두됐지만 모습을 원형 그대로 교체, 수리해 보존하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문제는 새로 교체한 모니터도 중고품이기 때문에 누구도 수명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재의 ‘다다익선’은 계속 수리 중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사실 재가동 행사 날에도 모니터 하나가 꺼지는 ‘애교’를 보이기도 했다. 재가동을 위한 실험 결과, 하루 2시간 정도가 최적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 4일 동안 오후 2시에 스위치를 올리고 있다. 두꺼비집의 전원을 켜는 데도 10분 정도 소요된다. 모니터의 손상을 줄이기 위해 약간의 간격을 두면서 스위치를 올리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누전 방지를 위해 내부에 냉각 장치를 설치하고 전원(電源) 분전함을 5개로 증설했고, 각각 12대 미만의 모니터와 연결하는 등 예방 조치를 취했다.

‘다다익선’은 총 4개의 채널로 이루어졌다. 분할 화면 9개의 모니터가 한 개의 채널로 이루어지든가, 3개의 채널이 대각선으로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현재의 ‘다다익선’은 항상 4개의 채널이 1003대의 모니터를 명멸시키고 있다. 대개 한 사이클을 도는 데 30분가량 소요된다. 반짝반짝.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은 무수한 이미지의 명멸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화면 전환이 너무 빨라 이미지의 숫자를 세기 어려울 것이다.

백남준은 초기 비디오 아트의 대중적 관심을 이끌기 위해 이미지의 명멸이라는 전략을 도입했다. 유목민의 생리는 항상 새로운 풍광과 마주하는 것이다. 반짝반짝. ‘다다익선’은 오늘도 과천관 로비에서 명멸하고 있다. 잠든 세상을 향해 눈 떠 있으라고 죽비를 드는 것 같다.

올해는 백남준 탄생 90주년의 해였다. 마침 ‘다다익선’ 재가동의 해여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축제’를 마련했다.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이라는 제목의 ‘다다익선’ 관련 아카이브 전시를 비롯해 백남준의 대표작급을 대거 동원한 ‘백남준 효과’ 전시,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도 열었다. 정말 백남준 축제의 과천관이었다. ‘다다익선’ 보존 처리 과정은 두툼한 백서 발행으로 국제 무대에 보고할 예정이다.

재가동과 더불어 희소식이 있다. 그동안 한국인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백남준의 맏조카이자 저작권 승계자 겐 백 하쿠다(한국명 백건)의 축하 메시지다. 나는 이 편지를 받아 보고 그동안의 어려움을 단숨에 다 날려 보냈다. 더불어 ‘백남준 효과’ 전시 개막에 즈음해 하쿠다는 다시 축하의 메시지를 나에게 보냈다. “‘백남준 효과’ 전시 개막을 축하합니다. 한국과의 관계는 백남준 작가의 미술세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기리는 전시를 기획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이 때때로 한국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미술계의 국제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로 만들어지게 돼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미술 잡지 ‘아트포럼’은 ‘2022년의 베스트’라는 특집에 백남준의 ‘다다익선’ 재가동을 선정했다. 본문에 자세히 소개했을 뿐 아니라 표지화(表紙(화,획))로도 선정해 올해가 명실 공히 ‘다다익선’의 해였음을 추인했다. 경하스러운 일이지 아닐 수 없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백남준#다다익선#비디오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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