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명확히 보장 안된 ‘오전 오프’, 제대로 쉰 것 아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뇌출혈로 쓰러진 기저질환 근로자… 과로-스트레스로 악화 가능성 상당”
‘업무상 재해’ 인정한 원심 확정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2.3.14/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2.3.14/뉴스1
업무 중 쓰러진 근로자가 주 52시간을 지켜서 일했고 평소 기저질환이 있었더라도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법원은 표면상 나타나는 근로 시간과 의료 기관의 진료 감정 등을 넘어 실제 근로자의 입장에서 근로 환경을 적극적으로 살폈다. 특히 야간 근무 뒤 ‘오전 오프’를 두고 명확한 규정으로 보장되지 않은 오전 휴식은 “제대로 쉰 것이 아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린 점이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주 52시간 지켰고 의료기관도 “과로 때문 아니다” 판단
한 행사준비업체 직원인 A 씨(38)는 2016년 4월 대전의 한 청소년수련원에서 캠프파이어 행사를 위해 야외무대를 설치하던 중 뇌출혈 등으로 쓰러졌다. 이로 인해 중증 좌반신 마비 등을 겪게 된 A 씨는 2년 뒤 근로복지공단에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며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그러나 공단은 “업무상 과로에 해당하지 않고 고혈압과 비만 등 개인적 요인으로 발병된 것으로 판단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A 씨는 이에 불복해 공단을 상대로 “요양 급여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며 소송을 냈다.

통상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 인정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총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을 넘겼는지 여부와 업무가 질병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의료기관의 판단 등이다. 그런데 A 씨는 평소 고혈압과 비만이 있었고, 출퇴근시간이 유동적이긴 했지만 늦게 퇴근하면 ‘오전 오프’를 하고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등 대체로 평균 주 52시간을 지켜 근무했다. 진료 기록 감정 결과도 A 씨에게 불리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사고 원인은 과로보다는 기저질환인 고혈압과 비만이 원인으로 추정된다”는 취지의 감정 결과를 내놨다.

2020년 10월 1심 재판부는 “A 씨의 병이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A 씨의 발병 전 1주간 총 업무시간은 51시간, 발병 전 4주간 업무시간은 평균 53시간, 발병 전 12주간 평균 업무시간은 49시간”이라며 “A 씨의 업무부담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변화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진료기록 감정 결과 등을 토대로 “A 씨의 병이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로 자연적인 경과 이상 급격하게 악화됐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업무가 병을 유발하지는 않았더라도 기저질환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판단한다면 업무상 재해가 인정될 수 있는데, A 씨의 경우 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 2심 재판부 “보장 안 된 오전 휴식, 쉬어도 쉬는 게 아냐”
그러나 이 사건 항소심을 심리한 대전고법 행정2부(부장판사 정재오)는 지난해 12월 “근로복지공단의 요양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며 1심 판단을 뒤집고 A 씨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A 씨가 업무 부담 가중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함으로써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상태에 있었다고 인정된다”며 “A 씨의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가 고혈압을 자연 경과 이상으로 악화시켜 뇌혈관 질병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 씨가 대체로 주 52시간을 지켜 근무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행사 준비 업체에서 근무하며 업무 부담을 가중시키는 여러 환경 아래 노출돼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행사가 끝나야 퇴근할 수 있어 야간 근무가 잦았던 점 △ 행사가 있는 휴일에 근무를 하고도 대체휴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던 점 △행사 의뢰를 받으면 근무하는 형태라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웠던 점 △행사 준비를 위한 장거리 이동, 장비 운반과 설치 등 육체적 노동 강도가 높았던 점 등이다.

특히 재판부는 A 씨가 야간 근무나 휴일 근무를 한 다음 날에는 오전에 쉬고 오후에 늦게 출근했지만, 이런 오전 오프 근무가 업체 사장에 의해 명확하게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이는 A 씨의 피로 누적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이라며 “사용자의 배려조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A 씨가 온전한 휴식을 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했다. A 씨는 오전 오프 중에도 업무 관련 연락을 받거나 새로운 행사 의뢰가 들어와 갑자기 출근할 가능성 등을 신경 써야 했기에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을 것’이라는 취지다.

이외에도 재판부는 A 씨의 기본급이 매우 낮아 행사 참여 수당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한 구조적 여건에 놓여 있었던 점, 업체에서 총무 업무와 음향·조명장비 설치 관리·창고 이전 업무 등 거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한 점 등을 업무 부담 가중 요인으로 봤다.

과로로 인한 병이 아니라고 본 진료 기록 감정 결과에 대해서도 “발병 전 4주간 평균 업무시간이 36시간, 발병 전 12주간 평균 업무시간을 33시간으로 전제한 것으로 (실제) 근로시간보다 적은 것으로 보이므로 이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이 같은 2심 판결을 14일 확정했다.

● A 씨 대리한 변호사 “숫자 뒤에 숨겨진 이면 적극적으로 파악한 판결”
2심에서 A 씨의 소송대리를 맡았던 법무법인 마중 권규보 변호사는 “근로 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아도 업무 부담 가중 요인이 있으면 업무상 재해가 되고, 진료 기록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법원이 인과관계를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게 대법원이 정립한 원칙”이라며 “2심 판결은 이 원칙에 충실해서 오히려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했다. 법원에서 개별 사건에 대해 이런 원칙에 부합하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권 변호사는 재판부의 오전 오프 관련 판단에 대해서도 “재판부가 오전 오프 중 A 씨가 실질적으로 사업주의 지배 하에 있었는지 여부를 살피지 않고 이를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계산했다면 이는 오히려 업무상 재해 인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재판부가 실제 근무 환경의 이면을 구체적으로 살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
#오전 오프#뇌출혈#과로#스트레스#휴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